38년 멈춘 필리핀 원전, 한국이 타당성 검토한다
윤 대통령, 마르코스 대통령과 정상회담 … ‘전략적 동반자 관계’ 수립
대형 인프라 사업에 협력기금 19억달러 지원 … “한국 기업 참여 마중물”
1986년 체르노빌 사고로 중단된 필리핀 바탄 원전의 건설 재개 타당성 조사를 한국이 맡아서 진행한다. 동남아 3국 순방 중 첫 국가인 필리핀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7일(현지시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고 이같은 성과를 내놨다.
이날 오전 마닐라 대통령궁에서 열린 정상회담 후 윤 대통령과 마르코스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를 통해 회담 성과를 공개했다.
윤 대통령은 “마르코스 대통령님과 저는 에너지, 디지털 전환과 같은 미래지향적인 분야로 협력의 지평을 확대하고, 지속가능한 성장 동력을 확충해 나가기로 했다”면서 “두 정상은 무탄소 에너지원으로서 원전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이번 ‘바탄 원전 재개 타당성 조사 MOU’ 체결을 계기로 양국 간 원전 협력 기반을 강화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마르코스 대통령은 “원자력 분야 한국의 성공담에 기초하여 바탄 원전 재개를 위한 타당성 조사 관련 양해각서에 서명했다”면서 “이를 통해 바탄 원전 재개와 관련 면밀한 타당성 조사를 시행하여 필리핀 에너지 안보에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전날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한국이 2009년 UAE 원전 수주에 이어, 올해 체코 신규원전 건설 사업에 우선협상자로 선정된 만큼, 필리핀과 최적의 원전 협력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임을 강조했다”면서 “마르코스 대통령도 원전과 관련해 한국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양 정상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수력원자력과 필리핀 에너지부는 ‘바탄 원전 재개 타당성 조사 MOU’를 체결했다. 박춘섭 경제수석은 이와 관련해 “필리핀 정부는 경제성장에 필수적인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원전을 다시 도입하기로 했다”면서 “한수원은 바탄 원전 건설 재개 관련 경제성, 안전성 등 사업 추진의 타당성을 조사할 예정이며, 이를 계기로 고효율 청정에너지원인 원전 분야에서 양국 간 협력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바탄 원전은 우리나라 고리 2호기와 동일한 노형으로 621㎿(메가와트)급이다. 한수원은 고리 2호기를 40여년간 운영해 온 경험을 갖고 있어 바탄 원전의 타당성 조사 수행 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수원의 타당성 조사 시행은 향후 필리핀은 물론 동남아 지역 원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 마련의 의미가 크다.
양 정상은 이날 ‘대한민국과 필리핀 공화국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공동선언’을 발표해 양국 관계의 격상 사실도 발표했다. 1949년 한·필리핀 수교 후 75주년을 맞아 관계 격상을 이룬 셈이다.
윤 대통령은 공동언론발표에서 “필리핀은 6.25 전쟁 때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규모의 병력을 파견해 준 대한민국에게 고마운 친구의 나라”라면서 “저와 마르코스 대통령님은 양국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여 한국과 필리핀의 관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밝혔다.
양국 관계 격상에 맞춰 각종 분야에서 양국 협력 수준도 높아질 전망이다. 특히 국방·방산·해양 분야의 안보 협력이 강화된다. △필리핀에서 실시되는 연합훈련에 우리 군 참여 확대 △필리핀의 군 현대화 사업에 한국 참여 확대 △해상 초국가범죄 대응, 정보 교환, 수색구조 등 협력 확대 등이 진행된다.
경제협력도 더욱 강화된다. 필리핀 내 대형 인프라 사업에 대한 한국 기업 참여도 확대될 전망이다. 두 정상은 공동언론발표에서 라구나 호수 순환도로와 PGN 해상교량 건설 사업을 한국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을 활용해 진행하기로 한 것을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다.
박 경제수석은 이에 대해 “라구나 호수 순환도로와 PGN 해상교량 사업은 EDCF 최대 규모의 사업”이라면서 “필리핀의 지역경제 발전을 지원하는 동시에 우리나라 기업의 대형 인프라 사업 수주를 지원함으로서 양국이 윈윈하는 경제 협력 성과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라구나 호수 순환도로 건설 사업은 총 37.5㎞의 도로를 건설하는 사업으로, 한국은 첫번째 구간인 7.9㎞ 건설에 약 9억500만 달러를 지원할 예정이다. PGN 해상교량 사업은 필리핀 중부에 있는 3개의 섬인 파나이, 귀마라스, 네그로스 섬을 연결하는 사업으로 한국은 첫 번째 교량 13㎞ 건설에 10억 달러를 지원한다.
윤 대통령은 전날 동포 만찬 간담회에서도 전략적 동반자 관계 수립을 알리며 “무역, 투자 분야의 경제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가운데 공급망, 인프라, 에너지, 방산과 같은 미래지향적인 분야로 협력의 지평을 넓혀나갈 것”이라면서 “양국 관계 발전의 혜택을 동포사회가 가장 먼저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7일 정상회담 전 윤 대통령은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호세 리잘을 기리는 리잘공원을 찾았다. 호세 리잘이 스페인군에게 공개 처형된 자리에 조성된 이 공원 내에는 호세 리잘의 유해와 저서 두 권이 안치된 기념비, 필리핀의 6.25전쟁 참전 60주년을 기념해 2010년에 만들어진 ‘필리핀-한국 우정의 탑’,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강제 동원돼 필리핀에 파견된 한국인 피해자 765명을 추모하고자 건립된 ‘추도와 평화기원의 탑’이 위치해 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한-필리핀 비지니스 포럼 일정까지 소화한 후 1박2일 간의 필리핀 국빈 방문 일정을 마무리한다. 같은 날 오후 두번째 국빈 방문국인 싱가포르로 이동한다.
마닐라=김형선 기자 egoh@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