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노벨경제학상이 일깨운 ‘포용’의 가치
지난주 막을 내린 올해 노벨상 수상자 발표 시즌은 대한민국에 큰 축제를 선물했다. 작가 한 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데 이어 한국과 관계 깊은 경제학자 3명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대런 아제모을루 교수와 사이먼 존슨 교수, 시카고대학교의 제임스 로빈슨 교수가 국가 간 불평등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는데, 이들이 경제발전의 모범 성공사례로 꼽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세 경제학자는 “포용적 제도를 지닌 국가는 번영하고, 착취적 제도를 지닌 국가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체계적 이론 및 광범위한 역사적 사례와 함께 조목조목 입증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포용적인 제도를 운영해 번영을 일군 대표적인 나라가 한국이라는 게 이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아제모을루 교수와 존슨 교수가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공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Why Nations Fail)’에 게재한 ‘한반도 야경’ 위성사진이 특히 유명하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휴전선 남쪽은 한밤중에도 곳곳에 휘황한 불빛이 넘쳐나는데 북쪽은 암흑천지임을 드러낸 사진이다.
지금 한국사회, 포용적 경제제도와 거리 멀어
이들의 노벨경제학상 수상 소식은 많은 한국인들을 우쭐하게 했다. 언론과 경제학계는 대부분 남북 간 체제경쟁에서 대한민국이 거둔 ‘완승’을 다시 한번 공인받았다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요즘의 한국 상황은 이들이 주목한 ‘포용적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지난날의 성취를 인정받은 데 도취할 게 아니라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떤가’를 냉철하게 살피는 계기로 삼는 게 언론과 학계의 과제일 것이다.
아제모을루 교수는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포용적 경제제도는 안전한 재산권과 함께 기회균등, 공정한 경쟁환경 등이 뒷받침되고 있느냐가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국가 구성원들이 공평한 발언권을 갖고 권력을 동등하게 나눠 갖는 포용적 정치제도 역시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그렇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묻는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을 선뜻 내놓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역동적인 경제사회 발전과 도약의 주역이었던 기업들을 옥죄고 발목 잡는 법규가 너무 많아졌다. 돈과 ‘빽’이 없어도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도전정신으로 기업을 일궈 성공신화를 창출하게 도와줄 제도적 환경도 갈수록 허물어져 가고 있다. 정치권이 극단적인 진영대결에 빠져 충분한 논의를 외면한 채 부실입법을 대거 쏟아내고 있는 탓이 크다.
기업인들의 잘못을 형벌로 다스리도록 규정한 법 조항이 5886개(지난해 정부 태스크포스 발표 기준)나 돼 국내 기업인들은 물론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기업 최고경영자들까지 “결재할 때마다 감옥 가는 것 아닌가를 걱정해야 한다”고 비명 지르는 나라가 됐다.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려는 벤처기업가들이 기득권 카르텔에 발목 잡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타다’ 택시 불법화 등이 잇따르면서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도 자리잡은 지 오래인 ‘공유경제’가 한국에서만 맥을 못추고 있다.
지난해 해외진출 기업은 2816곳, 유턴 기업은 22곳
그 결과는 기업들의 대규모 ‘한국 탈출’로 나타났다. 지난해 해외에 진출한 국내 기업이 2816곳에 달한 반면 해외에서 국내로 돌아온(유턴) 기업은 22곳에 불과했다. 매년 유턴 기업이 평균 300~600곳에 이르는 미국 일본과 비교할 때 참담한 수준이다. 한국은 지난 5년간의 유턴 기업을 다 합쳐도 108곳에 불과하다.
기업들의 잇단 ‘엑소더스’가 낳는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빚어지는 후유증이 심각하다.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구직활동을 아예 포기한 청년이 사상 최대수준으로 치솟았다. 자신감을 잃은 청년층이 ‘3포(취업과 연애, 결혼을 포기) 세대’로까지 불리면서 저출산 등 많은 사회적 위기를 낳고 있다. 직장에서 밀려난 중·장년층이 생계유지를 위해 자영업에 잇따라 뛰어들면서 한국은 전체 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자 비중이 주요 선진국들의 2~4배에 달하는 기형국가가 돼 버렸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에서는 위기의식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야당 가릴 것 없이 힘겨루기 정쟁에 여념이 없고, 올해 국정감사 시즌에도 어김없이 기업인들을 ‘애로 청취’가 아니라 ‘망신주기 호통 대상’으로 증언대에 세웠다. 이래서는 안된다. 한국 경제가 다시금 의욕과 활력을 되찾게 할 포용적 제도 환경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 이것이 올해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발표에서 한국이 새겨야 할 진정한 메시지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