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성평가 노동자 참여
자기규율 강조 ‘위험성평가’ 사업장 23% “한 적 없다”
민주노총 실태조사, 모든 평가단계에서 노동자 참여 배제 34% … “미이행시 처벌 등 강제성 부여해야”
고용부는 2022년 11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위험성 평가를 자기규율 예방체계의 핵심수단으로 제시했다. 위험성평가는 2013년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으로 도입됐지만 10년이 지나도록 현장에 안착하지 못했다. 사업주 책임성과 노동자 참여 부분을 빼고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있었다.
지난해 5월 기존 위험성 평가 제도가 복잡하고 어려워 인력이 충분하지 않은 중소사업장에서는 참여가 저조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업장 위험성평가에 관한 지침(고시)’을 개정했다. 개정 지침은 △위험성평가 재정의 △평가방법 다양화 △평가시기 명확화 △노동자 참여 확대 △평가결의 공유 등을 원칙으로 했다.
새 지침에서는 위험요인 파악과 개선대책 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재해가 일어나는 빈도(가능성)와 강도(중대성)를 수치화해서 계산하는 ‘추정’단계를 삭제했다. 그 대신 위험성평가를 계량적으로 산출하지 않고도 가능하도록 체크리스트, 핵심요인기술법(OPS), 위험수준 3단계(저·중·고) 판단법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기존 지침에 정해져 있지 않던 최초평가 시기를 사업장 성립일로부터 1개월 이내 착수하도록 명확히 규정했다. 정기평가는 최초평가 결과의 적정성을 재검토하는 것도 인정하고, 수시평가는 공정이나 기구 변동으로 인한 추가적인 위험 요인이 있을 때 시행하도록 개선했다.
더 나아가 수시평가를 매번 실시하기 어려운 업종 등을 고려해 상시평가 제도를 도입했다. 상시평가는 매월 1회 이상 유해·위험요인을 파악해 감소 대책을 마련하고, 매주 안전보건관리책임자를 중심으로 위험성평가 결과를 공유하고, 매일 근로자와 ‘작업 전 안전점검회의’(TBM)을 실시해 이를 안내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위험성 평가가 산업안전보건법상의 의무이지만 결과 보고 의무나 처벌 조항이 없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 6월 화재 사고로 23명이 숨진 경기 화성시 일차전지 제조업체 아리셀은 위험성 평가 우수사업장으로 인정돼 산재보험료 감면까지 받았지만 참사를 막지 못했다.
#. 올해 국정감사에서 위험성 평가 특화 점검 실시 사업장 중 12%인 1470곳에서 재해가 발생하고 사망자도 14명이나 발생한 사실이 드러났다.
윤석열정부가 규제와 처벌 중심에서 ‘자기규율 예방 및 엄중 책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의 핵심수단으로 내세운 위험성평가 제도가 실제 현장에서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용노동부 지침 개정으로 노동자 참여를 확대했는데도 사업장 10곳 중 6곳이 유해위험 요인 파악단계에서조차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민주노총은 8월 27일부터 이달 16일까지 소속 462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위험성 평가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61.6%만 ‘정기적으로 위험성 평가를 실시한다’고 답했다고 24일 밝혔다.
15.3%는 ‘위험성 평가를 하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하진 않는다’고 답했다. 22.9%는 ‘위험성 평가를 한번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민주노총은 “노조가 없거나 규모가 작은 사업장 현황은 더욱 심각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실태조사는 제조업 171곳, 건설업 152곳, 화학업 27곳, 보건의료 25곳, 운송 21곳, 서비스 20곳, 학교 7곳, 공무원 5곳, 기타 21곳이었다. 사업장 규모가 크고 노조가 있는 곳이 이 정도였다.
위험성 평가는 노·사가 함께 사업장 내 유해·위험요인을 스스로 파악해 개선대책을 수립·이행하는 제도다. 이번 민주노총 실태조사에 따르면 사업장에서 위험성 평가 지침을 위반한 사례가 다수 있었다.
지침에는 ‘위험성 평가의 대상이 되는 유해·위험 요인은 업무 중 근로자에게 노출된 것이 확인됐거나 노출될 것이 합리적으로 예견 가능한 모든 유해·위험요인’으로 규정했지만 모든 유해·위험 업무에 대해 위험성 평가를 실시한다는 사업장은 61.1%에 그쳤다. 10곳 중 4곳이 법 위반 사업장인 셈이다.
특히 28.6%는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감정노동 정신건강 분야는 실시하지 않는다’는 사업장이 22.4%, ‘화학물질 분야는 실시하지 않는다’는 사업장이 7.3%였다.
위험성 평가하기 전 사업장 노동자를 대상으로 교육하는 곳은 41.2%에 불과했다. 지침은 유해위험 요인을 파악할 때 노동자를 반드시 참여토록 하고 관련 교육도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노조 참여 의무화, 활동 여건 보장해야” = 지침 6조(근로자 참여) 규정에는 노동자 참여 보장을 확대했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조사 대상 사업장의 34.0%는 위험성 평가 전과정에서 노동자 참여가 배제됐다.
평가 단계별 세부적으로 보면 유해·위험 요인 파악에 노동자 참여를 보장한다는 사업장은 43%였다. 이어 위험성평가 방법 결정에서 43%, 평가 후 현장 개선안 수집에서 34%, 현장개선 이행 여부 점검에서 33%, 평가결과 및 개선계획 보고에서 31%만 노동자 참여를 보장했다. 법을 준수하지 않는 사업장이 절반 이상인 것이다.
원·하청 사업장에서 원청이 하청 노동자 작업에 대해 위험성 평가를 한다는 응답은 32.8%에 그쳤다. 67.2%가 실시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실시한다고 답했다. 34.2%는 위험성 평가를 아예 실시하지 않아 법 위반 사업장이었다. 150개 건설업 사업장에서는 원청이 위험성 평가를 실시한다는 응답은 30%에 불과했다.
지침에 따르면 작업의 일부 또는 전부를 도급한 경우 하청사업장에 대해 원청 사업주와 하청 사업주가 각각 위험성평가를 실시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건설현장에서 원청의 주요 업무는 현장관리나 사무행정이고 현장의 위험은 하청 노동자 작업인데도 원청의 30%만이 하청 작업의 위험성 평가를 한다는 것은 충격적 결과”라고 지적했다.
위험성 평가 실시 뒤 형식적인 개선만 하거나 아예 개선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65.8%달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윤석열정부는 중대재해 감축의 핵심 사업으로 위험성평가에 예산과 인력을 집중시켰지만 기본사항인 유해·위험 요인 파악부터 노동자 참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위험성평가에 대한 처벌 규정이 없고 고용부에 보고 의무가 없어 현황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