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한-러 관계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나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던 북한군의 우크라이나전쟁 파병 전모가 곧 드러날 전망이다. 국가정보원은 29일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북한군이 오는 12월까지 총 1만900명 가량 파병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파병은 북한과 러시아가 지난 6월 맺은 ‘포괄적 전략적동반자관계 조약’을 근거로 삼는다. 이 조약은 어느 한쪽이 무력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면 지체없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파병은 북핵 문제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는 등 외톨이로 어려움을 겪던 북한이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같은 처지에 놓인 러시아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파병의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핵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군사기술을 전수받을 가능성과 함께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의 참전 가능성이 점쳐지는 등 한반도 안보지형에 미칠 영향이 지대하다.
북한군 우크라이나 파병에 윤 대통령 ‘살상 공격무기’ 지원 검토 발언
윤석열 대통령은 북·러의 군사협력 진전 정도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지원을 검토할 수 있다고 했다. 정부는 북한군 전력을 탐색하고 전술과 교리를 연구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모니터링단을 파견하거나, 북한병사가 포로로 잡히면 신문과정을 돕는 통역관 파견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는 한국이 ‘레드라인’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가혹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한때 돈독했던 한국과 러시아가 적국으로 대결하는 험악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을까. 러시아는 북방정책을 추구한 노태우 대통령 시절인 1990년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이 방한해 한-소 수교에 합의했다. 옐친, 푸틴 대통령 시절에도 북한보다 우리와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군 무기현대화에 기초를 닦은 ‘불곰사업’이다. 수교 때 경협차관을 받았던 러시아정부는 달러가 부족하자 부채 일부를 현물로 상환하겠다고 했고, 이에 따라 들여온 러시아제 무기들을 개량한 것이 우리가 세계 방산무기업계의 실력자로 나서게 된 발판이 됐다.
러시아와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서방국가들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윤 대통령은 나토정상회의에 참가하고 폴란드를 방문한 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깜짝 방문했다. 러시아와 교전중인 국가 방문도 놀라운 일이지만 “생즉사 사즉생의 정신으로 우리가 강력히 연대해 함께 싸워 나간다면 분명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는 폭탄발언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마치 ‘선전포고’라도 하듯 균형감을 잃은 처사 이후 러시아와의 관계는 악화일로 내리막길이었다.
러시아는 중국과 함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한반도 리스크’를 관리하는데 물밑으로 협력해야 할 중요 국가다. 그런데 미국이 내건 ‘가치외교’의 선봉장인양 러시아 제재에 앞장선 결과가 북러 군사협력 강화였고 북한군 파병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궁지에 몰린 국내정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일부러 안보정국을 조성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돌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너무 호들갑을 떤다는 느낌이다. 국정원이 앞장 서 과잉반응을 보이며 ‘북한군 파병’ 이슈를 크게 키우려고 애쓰는 모양새가 역력하다. 윤 대통령은 연일 나토 사무총장이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직접 통화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국회 국방위원인 국민의힘 한기호 의원이 신원식 안보실장에게 “우크라이나 협조를 구해 북괴군 부대를 포격하고 미사일 타격을 가해서 피해가 발생하도록 하고, 이 피해를 북한에 심리전으로 써먹었으면 좋겠다”고 한 조언은 이들의 속내를 드러낸 한 장면일 수 있다.
미국 압력에 밀려 한반도 안보에 중요한 러시아를 한사코 내친 결과
미국 대선이 코앞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트럼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거론한다. 만일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우크라이나전쟁 양상은 완전 달라질 것이다.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면 사실상 러시아의 승리로 조기에 휴전이 성립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살상무기 지원을 검토한다며 깊이 개입하는 것은 시기상으로도 맞지 않다.
외교는 각국이 국익을 최대화하기 위해 때로 대립하면서도 때로는 타협하는 것이 본령이다. 고집스런 성정에, 평생 검사생활로 굳어진 선악 이분법적 사고 등 윤 대통령의 독선과 ‘외곬신념’은 자칫 국가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위험성이 다분하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