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의 시를 찾아 떠나는 현장 답사기
질마재 이야기/윤재웅/깊은샘/1만9500원
‘질마재 이야기’는 무작정 호남선을 잡아타야 한다는 충동을 유발한다. 선운사쯤에서 적당히 한밤 잘 생각으로 구석에 처박아뒀던 배낭에 옷가지 한두 개 챙겨 넣고는 터미널이든 기차역이든 가까운 곳으로 나서게 한다. 여명이 깃든 새벽 일찍 일수도 있고 어둠이 서둘러 내려와 노을을 등진 늦가을 저녁 무렵이어도 좋다. 인터넷에 미리 예약할 필요도 없고 정보를 검색해 볼 것도 없다. 사진도 있고 시도 있는 ‘질마재 이야기’를 옆구리에 끼고 발을 내디디면 미당 서정주의 시를 만나는‘답사’가 시작된다. 금세 문학평론가 윤재웅 교수(동국대)가 앞장섰다. 미당의 마지막 제자인데다 ‘서정주 시 연구’로 박사학위로 받았고 20권 한 묶음의 ‘미당 서정주 전집’을 편찬하기도 했으니 그는 답사 해설가로는 누구보다 제격이다.
윤 교수는 먼저 미당 문학의 발원지인 ‘질마재’부터 시작했다. 그의 고향 전북 고창 질마재 마을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는 명문장을 만들어낸 곳이다. 시집 ‘질마재 신화’의 소재들이 지키고 있는 현장은 시인의 외롭고 가난한 천성을 지니게 된 흔적들로 가득하다.
미당 시의 씨줄과 날줄로 재탄생한 줄포, 곰소, 고창읍성, 선운사, 하전 개펄과 그리고 그곳의 바람, 햇볕 등 배경들을 따라가다가 보면 어린 시절 그의 선생님이었던 외할머니와 진영이 아재, 서운니 누이, 석전 박한영 스님도 만날 수 있다.
미당의 시집에 스며들어 있는 생가, 외가터, 서당터, 도깨비집터, 신발 떠내려 보낸 냇물, 부안댁터, 알묏집, ‘간통사건과 우물’의 현장인 우물, 소자 이생원네 마누라님이 오줌 누워 키우던 무밭은 시집을 다시 들춰보게 만든다.
윤 교수는 ‘미당 마니아’답게 감상법을 능숙하게 펼쳐냈다. “칠산 바다에선 마음의 번뇌를 식히던 쓸쓸한 충만의 바다를 관조한다. 줄포와 고창에선 청소년 미당의 항일정신과 방황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돌아보고 선운사에서 처연한 동백의 붉은빛 낙화와 자신을 시인의 길로 인도한 석전 박한영과의 인연에 주목한다. 그리고 동리국악당에서 미당시가 도달한 전통의 세계가 가야금과 판소리로 이어진 미당의 전통소리에 대한 깊은 사랑에 있었음에 주목한다.”
이어 “동백나무 사라진 고창읍성의 빈터에 가서 ‘나의 시’를 읊으면 시인이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장모님의 펼쳐진 치마폭에 올려다 놓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에 ‘바다’, ‘조금’, ‘행진곡’, ‘영산홍’ 등에 녹아 있는 물 빠진 하전 개펄에 가면 빈 바다의 쓸쓸한 충만을 느껴보는 특별한 감회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풍천의 소금막에 들러 소금을 만들어 생계를 이어나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되새기고, 좌치 나루터의 나룻배를 타고 고립된 마을을 이어주던 문명의 열림을 경험해볼 것”이라는 조언도 곧바로 따라붙었다. ‘선운사’도 빼놓지 않았다. 그곳엔 ‘선운사 동구’ 시비가 있다고 귀띔해줬다.
미당으로부터 시적 세례를 받은 윤 교수가 길잡이로 나선 ‘질마재 이야기’는 또다른 시였다. 그는 스승 못지않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미당의 시적 성취를 때로는 번민하는 시인의 마음으로, 때로는 깨달음에 이르는 철인(哲人)의 육성으로 폭로했다.
고창 출신 박성기 대표의 사진은 곳곳에서 미당의 시와 그의 발자취를 조명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질마재 갯벌과 지천으로 흐드러진 노란 국화꽃밭, 선운사의 눈 내린 마당 풍경, 칠산 바다의 쓸쓸한 충만, 좌치 나루터의 홀로 매어둔 나룻배, 노을 지는 서해바다 풍경, 한적한 고창읍성의 오후, 줄포의 쓸쓸한 거리, 미당시문학관 내부에 전시된 유서 깊은 미당 가야금, 한문 필적이 좋은 아버지 서광한의 편지 등은 조연이 아닌 또다른 주연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윤 교수는 “서정주 문학은 생의 심층을 성찰하게 해 주는 매력이 있으며 우리의 전통사상과 풍속과 미학 등을 현재화시키는 데 기여한다”며 “10대부터 80대까지의 인생 경험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한국 문학사에서 흔치 않는 사례”라고 했다. 이어 “서정주 문학은 절대로 책상머리에 앉아서 상상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며 “자기가 간절하게 경험한 것들 위주로 시를 만드는 게 서정주 창작의 중요한 비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서정주 문학과 연관이 있는 삶의 구체적 현장을 돌아보고 싶었다”며 “시가 탄생한 공간, 시인이 지나쳤던 길가에 가서 시인과 시를 다시 불러내는 호명 의례 비슷하다”고 했다. 이어 “간절한 마음으로 시를 써야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몸으로 직접 겪는 경험 즉 체험이 중요하다”면서 “이런 체험의 무대가 곧 장소요 공간이며,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서정주 문학의 주인공이 된다. 그곳에 가서 그들을 만나는 게 이 책의 특징”이라고 소개했다.
이 책엔 미당의 자전적 일대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희귀 자료도 실렸다. 미당의 생전 시작노트를 비롯해 줄포공립보통학교 학적부, 동아일보 1930년 12월 18일 ‘학생압송사건’ 기사, 1936년 동아일보 신춘현상공모 입선 기사, 1938년 미당 결혼사진, 1940년 ‘신세기’ 11월호 ‘행진곡’ 시 발표 지면, 중앙고보 중 2때의 광주학생운동지지 시위로 퇴학된 사건 기록 등이 담겼다.
동국대 총장으로 재직 중인 윤 교수는 고창군 선운리에 있는 미당시문학관 개관 전시와 미당문학제를 기획했다. 저서로 ‘미당 서정주’, ‘문학비평의 규범과 탈규범’, ‘서정주 시의 사계’(전4권), ‘서정주학파’, ‘동국문풍’, ‘유럽 인문 산책’, 시집 ‘어쩌라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