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새 연인관계 남성에 여성 4명 살해당해

2024-11-13 13:00:21 게재

지난해 최소 49명 ‘교제살인’으로 숨져 … 유족단체 “입법 공백에 가해자 대담해져” 주장

군 장교가 연인관계이던 여성 군무원을 살해해 시신을 훼손하고 강원도 화천군 북한강에 유기한 사건이 이른바 ‘교제살인’이란 정황이 드러나면서 반복되는 유사범죄에 우려가 커지고 있다.

13일 경찰 등에 따르면 최근 일주일 사이 4명의 여성이 교제 대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에게 살해됐다.

지난 8일 경북 구미에서 스토킹 범죄 가해자로 신고된 이력이 있는 30대 남성이 전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날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오피스텔에서도 40대 남성이 3개월 간 알고 지내던 30대 여성을 살해했으며 교제살인으로 추정된다.

앞서 5일 경기 파주의 한 모텔에서 50대 남성이 자신을 무시하는 행동에 화가 났다며 연인을 살해했다.

◆교제 폭력도 2020년 이후 증가세 = 이처럼 교제관계였던 남성에 의한 강력범죄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어 심각성이 크다.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의 ‘언론 보도를 통해 본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한 여성 살해 분석’ 보고서 따르면, 2023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교제살인으로 숨진 여성은 49명으로 집계됐다. 이 중 미수에 그쳐 살아남은 여성도 158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의전화는 보고서에서 “실제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사건을 포함하면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살해될 위험에 처한 여성의 수가 훨씬 많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교제폭력 사건도 2020년 이후로 증가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교제폭력으로 검거된 피의자는 총 1만3939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2020년 대비 55% 급증한 수치다.

연도별로 보면, 2020년 8951명, 2021년 1만538명, 2022년 1만2828명 순차 급증하고 있다. 교제 폭력 신고 건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2020년 4만9225건에서 2021년 5만7305건, 2022년 7만790건을 기록하다 2023년 7만7150건을 기록해 최고치를 찍었다.

하지만 지난해 교제폭력으로 구속된 피의자는 전체 1만3939명 중 310명(2.22%)에 불과했다.

대검찰청은 지난해 교제폭력 사건 등에 관해 구속수사 원칙을 강조하며 사건처리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피의자에 대한 구속 건수는 이 같은 ‘교제폭력 범죄 엄정 대응 방침’에 미치지 못하는 등 엄벌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훼손 시신’ 유기 장소 찾은 군 장교 지난 6일 강원 화천군 북한강에서 함께 근무하던 여성 군무원을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하고 북한강에 유기한 현역 군 장교 A씨에 대한 현장 검증이 진행됐다. 사진은 A씨가 호송차에서 내려 취재진 질문에 묵묵부답하는 모습. 연합뉴스 강태현 기자

◆사각지대 없는 교제폭력 관련 입법 절실 = 사정이 이렇자 앞서 교제살인으로 가족을 잃었던 유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더 많은 교제폭력 피해와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며 국회에 관련 입법을 촉구하고 나섰다.

12일 거제 교제살인 사건, 부산 몽키스패너 살인미수 사건, 부산 오피스텔 추락사건, 당진 두 자매 살인사건, 인천 논현동 스토킹 살인사건의 생존자와 유가족 7명이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 소개로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지난 4월 1일 거제도에서 발생한 거제도 교제 폭력살인 사건 피해자의 어머니는 “저희 딸 효정이가 교제폭력으로 세상을 떠난 후 교제폭력법 입법을 촉구했지만 정부와 국회 어디에서도 아무런 답변도 들을 수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를 공권력이 지키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 가해자는 더욱 잔인하고 대범해졌다”며 “가해자의 살인협박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인천 논현동 스토킹 살인사건 피해자 유가족은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더 많은 피해자가 생을 등지기 전에 국회가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친밀 관계 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법안이 마련될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고 싸우겠다”고 밝혔다.

기자회견 참석자를 비롯해 교제폭력의 생존자·유가족들이 결성한 범죄피해자연대는 △사각지대 없는 교제폭력 관련 입법 추진 △실효성 있는 피해자 보호조치 도입 △경찰의 수사관행 변화 △피해자 회복 및 사후관리 지원 확대 △가해자 출소 후 대책 마련 등을 요구했다.

◆국회 문턱 못넘은 법안들 = 실제로 교제폭력 관련 법안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국회 등에 따르면 지난 21대 국회에는 교제폭력 범죄에도 임시조치 등 피해자 보호제도를 적용하게 해 피해자를 두텁게 보호하는 것을 골자로 한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권인숙 민주당 의원 대표발의)’ 등 총 4건의 관련 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어떤 시점부터, 또 어떤 관계까지를 교제한 거라고 볼지 기준을 정하기 어려워 혼란을 초래 할 수 있다는 이유 등으로 법제사법위원회와 여성가족위원회 등에 계류됐다 제대로 된 논의없이 의원 임기 종료에 따라 자동 폐기됐다.

하지만 해외에선 이미 관계 유형이나 주변 의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교제 관계를 정의하고 있어 사법 편의적 관점이란 비판이 나온다.

이날 기자회견을 주선한 용 의원은 “22대 국회에서 3건의 교제폭력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제대로 된 심사없이 계류되고 있다”고 설명하며 “국회가 조속한 심사에 나서야 하고, 미흡한 피해자 보호조치 등 발의된 법안의 한계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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