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상속후, 유족연금 공제해야”
대법원 전합, ‘공제후 상속’ 판례 30년만에 변경
유족 배상 더 받게 상속인들 권리 보호 강화돼
공무원 연금 수급권자가 교통사고 등으로 사망했을 때 퇴직연금을 유족들에게 먼저 상속하고 나서 유족연금을 공제해야 한다(상속후 공제)는 대법원의 새로운 판단이 나왔다. 기존 유족연금을 먼저 공제하고 나머지를 상속해야 한다(공제후 상속)는 30년 된 판례가 뒤집힌 것이다. 이번 판결로 유족이 받을 수 있는 배상 총액이 종전보다 늘어나 유족연금 수급권이 없는 상속인의 권리가 더 잘 보호될 전망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조희대 대법원장·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21일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A씨의 배우자 B씨와 두 자녀가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공제 후 상속’ 방식에 따라 손해배상액을 산정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1996년부터 교수로 재직해 사학연금 수급 대상자였다. 퇴직 후 연금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 사망하면 유가족은 정년 퇴직을 가정해 미래에 받아야 할 퇴직연금 상실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에 배우자 B씨와 두 자녀는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를 상대로 퇴직연금 상실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쟁점은 퇴직연금 손해배상액 산정 방식이었다. 이는 배우자 B씨가 받는 유족연금을 공제하는 방식과 연결된다. 사학연금법은 사학연금 수급 대상자가 사망하면 유가족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유족연금을 지급하도록 정하고 있다. 다만 퇴직연금 상속분과 유족연금을 이중으로 지급하진 못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전체 퇴직연금 손해배상 채권액에서 유족연금액을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상속 비율에 따라 나누는 ‘공제 후 상속’과 퇴직연금 손해배상 채권액을 먼저 나누고 이후 유족연금 수급자(배우자)에게서만 유족연금액을 공제하는 ‘상속 후 공제’ 중 어떤 방식을 택하는지에 따라 손해배상액의 계산이 달라진다.
B씨는 사학연금공단에서 유족연금으로 1억4900만원을 일시금으로 받았다. 자녀들은 “어머니만 유족연금을 받았으니 공제도 어머니에게서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조합 측은 공제 후 상속을 채택한 1994년 대법원 판례를 근거로 유족연금액을 공제하면 잔액이 없어 손해배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맞섰다.
일반적으로 유족연금이 손해배상 인정액 보다 크기 때문에 유족연금을 먼저 공제하면 두 자녀가 받을 손해배상액은 없지만, 상속 후 공제 방식이 되면 배우자 손해배상 몫에서만 유족연금이 공제돼 두 자녀에게 손해배상액이 일부 돌아가게 된다.
1심 법원은 ‘상속 후 공제’ 방식을 택했다. 퇴직연금을 배우자 B씨와 자녀들이 나눠가지고, 유족연금(월 640만원)은 B씨 몫에서만 공제해야 한다고 봤다. 이 계산에 따르면 B씨가 받을 퇴직연금은 유족연금을 받았기 때문에 0원이 되지만, 자녀들은 각각 약 4600만원의 퇴직연금을 받는다.
그런데 2심은 기존 대법원 판례인 ‘공제 후 상속설’을 인용해 판결했다. 2심 판결에 따르면 자녀들이 받을 몫이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대법원은 대법관들의 전원 일치 의견으로 ‘상속 후 공제설’을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유가족의 생활 안정과 복지 향상을 위하는 연금 목적에 부합하며, 자녀들에게도 퇴직연금을 상속 받을 권리가 있다는 취지에서다.
대법원은 “수급권자가 아닌 상속인들은 상속받은 일실(잃어버린) 퇴직연금 상당의 손해배상채권을 지급받더라도 같은 목적의 급부를 이중으로 지급받는다고 볼 수 없다”며 “수급권자가 아닌 상속인들이 상속한 일실 퇴직연금 상당의 손해배상채권에서 직무상 유족연금을 공제할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이어 “‘공제 후 상속’ 방식과 같이 손실전보의 중복성을 강조해 일실 퇴직연금 상당의 손해배상채권에서 직무상 유족연금의 공제 범위를 넓게 인정한다면,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는 재원으로 가해자의 책임을 면제시키는 결과가 된다”며 “수급권자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위한 사회보장법률의 목적과 취지가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이날 전원합의체 판결로 공무원연금법과 사학연금법에서 ‘공제 후 상속’ 방식을 취했던 1994년 대법원 판례가 약 30년만에 변경됐다.
대법원 관계자는 “‘상속 후 공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피해자인 망인의 상속인들의 권리를 더욱 보호하고, 수급권자가 상속분을 초과해 직무상 유족연금 일부를 중첩해 받더라도 이는 생활보장적 성격으로 지급되는 것으로서 사회보장법률의 목적과 취지에 맞는 판결을 내렸다”고 판례 변경 의의를 설명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