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자 모른 정치후원금, 기부자 무죄”
1심, 후보자 무죄·기부자 유죄
2심 기부행위 미수 … 모두 무죄
대법, 원심 잘못 없어 무죄 확정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를 위해 비용을 들여 사무실을 빌렸지만 관련 내용을 후보자가 몰랐다면, 후보자 뿐만 아니라 사무실을 임차해 기부한 사람도 처벌할 수 없다고 대법원이 판단했다.
정치자금을 불법적으로 기부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은 셈으로, 미수범 처벌 규정이 없는 정치자금 부정수수죄 규정상 정치자금을 받지 않은 사람이 처벌받지 않는 것은 물론 주려고 한 사람도 처벌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흥수 전 인천 동구청장과 A씨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2일 밝혔다.
이 사건은 2017년 10월쯤 발생했다. 당시 이흥수 전 인천동구청장은 재선을 위해 지지 모임을 조직했고, A씨는 본인의 계좌로 회비를 수령하는 등 모임을 관리했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선거사무실을 이 전 청장 명의로 임차했다. 보증금 800만원에 월세 100만원이었다. A씨는 총 1400만원을 임대인에게 송금했다.
검찰은 이 전 청장과 A씨를 정치자금법 위반의 공범 관계로 재판에 넘겼다. 검찰은 A씨가 정치자금법에 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 전 청장을 위해 기부 행위를 했다고 봤다. 동시에 이 전 청장은 해당 금액을 기부받았다고 보고, 함께 재판에 넘겼다.
재판 과정에서 이 전 청장은 혐의를 부인했다. 이 전 청장 측은 “A씨가 본인의 명의를 위조해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것”이라며 “계약 체결 사실, 보증금 지급 사실 자체를 몰랐을 뿐 아니라 허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정치자금 부정수수에 대한 고의가 없다는 취지였다.
A씨는 본인이 시의원이나 구의원에 출마하기 위해 사무실을 계약했지만 출마가 무산된다면 이 전 청장을 비롯한 다른 후보자에게 대가를 받고 양도할 생각으로 이 같은 계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불법 정치자금을 기부받은 혐의를 받은 이 전 구청장에 대해서는 1·2심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그가 사무실을 빌리는 과정에 관여했거나 최소한 빌렸다는 사실을 알았는지도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준 쪽’인 A씨에 관한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A씨가 이 전 구청장의 재선 선거운동에 쓸 목적으로 사무실을 빌려 임대료 상당액을 정치자금으로 준 게 맞는다고 보고 벌금 90만원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대향범’ 법리를 주된 근거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향범이란 2명 이상의 참여자(기부자·수수자)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동일한 목표(정치자금 불법 기부)를 실현하는 범죄로,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가 둘 다 있어야 죄가 성립한다.
이 전 구청장이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평가할 수 없으므로 A씨가 정치자금을 줬다고 인정할 수도 없다는 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나아가 정치자금 부정수수죄는 미수범 처벌 규정이 없어서 A씨가 기부하려고 했다는 것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고 재판부는 설명했다.
검찰은 이 전 구청장의 무죄에는 상고하지 않았지만, A씨에 대해서는 법리 오해 등을 이유로 상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며 검찰 상고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한쪽에 의해 정치자금이 마련은 됐으나 건네지지 않은 단계에서는 정치자금법 위반죄로 처벌할 수 없고 해당 사건에서 A씨가 정치자금 제공행위를 완료했다고 볼 수 없어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단은 잘못이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다만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무죄 원심을 단순히 수긍했을 뿐 명시적으로 법리를 밝힌 것은 아니기 때문에 향후 다른 유사 사건에 미칠 영향에 관해서는 예단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