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없는데, 보험금 수익자 조카는 안될까요”

2024-12-03 13:00:21 게재

보험금청구권신탁 인기

반려동물·기부금 요구 다양

“자녀가 없는데, 조카를 수익자로 지정할 수 있을까요?”

최근 한 대형 생명보험사를 찾은 중년 여성 고객의 질문에 담당 직원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종신보험 등 생명보험 가입자거 자신이 사망했을 때 지급되는 보험금의 수익자를 생전에 지정할 수 있도록 한 게 보험금청구권 신탁이다. 현재는 자녀 등 직계존비속과 배우자만 가능하지만 고객들의 요구는 다양하다.

3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보험금청구권 신탁이 도입된 후 한달도 안돼 주요 생명보험사 계약이 300건을 돌파했다. 신탁 계약금액만 1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고객들이 다양한 요구를 쏟아내면서 시장이 성장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가입 =초기 신탁계약을 한 보험 가입자들은 가정사가 일반적이지 않다.

이혼한 전 배우자가 자신의 사망보험금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사망보험금이 온전히 지급되기를 바랄 때 신탁을 찾는다.

중병을 앓고 있는 고객이 자신의 사망보험금을 유족에게 미리 분배하는 계약도 있다. 얼마 안되는 보험금을 놓고 가족이 다투지나 않을까 우려해서다.

가족 중 장애인이 있는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자녀가 있는 이 고객은 비장애인 자녀에게 더 많은 보험금을 주기로 했다. 비장애인 자녀가 계약자 대신 장애인 형제를 보살피길 바래서다.

씀씀이가 헤픈 자녀 대신, 손자에게게 보험금을 책임지고 넘겨달라는 조부모의 요구도 눈길을 끈다.

한 보험사 신탁 담당자는 “신탁 시장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온 고객들이 있다”며 “가정사가 일반적이지 않거나 결핍을 가지고 있는 경우”라고 전했다. 그는 “신탁 계약서는 생전유언장 작성과 같아 고객이건 직원이건 계약서 작성 과정은 엄숙하다”며 “특히 한부모 가정이나 자녀 중 장애인이 있는 경우, 계약자가 살아온 삶을 묵묵히 듣고 있던 담당 직원이 사무실로 돌아와 눈물을 쏟아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망보험금 기부 요구도 =고객 요구는 다양하다. 앞서 제시된 사례처럼 1인 가구나 자녀가 없는 보험 가입자 등은 친척이나 이웃 등 친분이 두터운 이들을 수익자로 원하고 있다. 하지만 보험금청구권 신탁이 초기인만큼 금융당국은 수익자를 배우자와 직계존비속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보험사들은 차츰 수익자 범위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1인 가구가 증가하고 가족 구성이 과거와 달리 다양해지면서 고객들의 신탁 수요도 다양하다”며 “계약과 상담을 하다보면 고객들이 유족들에게 ‘기억되려는 욕구’가 상당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수용하는 방안을 마련중”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아닌 키우고 있는 반려동물을 수익자로 지정하고 싶다는 요구도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곳에 사망보험금 일부라도 기부되길 바란다는 의사도 있다. 소액이라도 기부가 가능했으면 좋겠다는 고객의 요구가 예상보다 많아 보험사도 고민중이다.

◆1억~3억원이 대부분 =보험금청구권 신탁을 ‘부의 대물림’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고액 자산가의 사망보험금을 안정적으로 상속하는 도구라는 이야기다.

보험사들이 고객 정보 때문에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현재까지 이뤄진 신탁 계약 중 20억원 초과는 10% 미만 수준이다. 이는 상속세 제도와 무관치 않다. 사망보험금 20억원 이상인 경우 신탁이 아닌 다른 경로를 찾아야 세금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한 보험사 자산관리 담당자는 “3억원 정도는 서울지역 아파트 전세보증금으로 쓰기에도 부족한 정도”라면서 “신탁이 자산가들에게만 쓰이는 용어처럼 보이지만 보험금청구권으로 인해 보험과 신탁 개념에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충분한 데이터가 집계돼지 않았지만 남성보다 여성 가입이 늘고 있고, 유병자나 고령자에서 젊은층 계약도 늘고 있다.

아예 신규 생명보험에 가입하면서 신탁 가입을 요구하는 고객도 있다. 흥국생명은 이를 노리고 종신보험과 보험금청구권 신탁과 연계한 ‘내가족 안심상속 종신보험’을 출시했다.

◆계약내용 변경 용이해 =신탁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삼성생명과 교보생명이다. 삼성생명 214건(11월 26일 기준, 신탁금액 840억원), 교보생명 123건(11월 29일 기준, 신탁금액 140억원) 등의 실적을 기록했다.

보험금청구권 신탁 표준 약관이 마련되지 않은 터라 보험사마다 절차와 수수료 등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계약서 작성과 동시에 수수료를 받는 곳이 있는 반면, 사망보험금이 지급되는 시점(가입자 사망 시점)에 수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신탁수수료도 보험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성년 후견인으로 법원으로부터 지정된 변호사 보수(후견 대상자 재산의 5~10%)와 비교하면 저렴한 수준이다.

신탁자금과 관련해 삼성생명은 예금, 교보생명은 계약자 요구대로 운용키로 했다.

가장 관심이 큰 것은 계약 변경이다. 고객 변심이나 가족의 변화로 수익자와 수익금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유언장의 경우 3년에 한번 갱신해야 하고 추가 비용이 소요된다. 하지만 보험사들은 고객 요구에 따라 신탁계약을 수시 변경할 수 있도록 했다.

고객이 최초 계약 후 인지장애, 치매를 앓을 것을 대비해 매뉴얼을 만들었고, 수익자간 법적 갈등을 대비해 신탁사(보험사)가 고객을 대신해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는 절차까지 마련했다.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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