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칼럼

양자얽힘과 탄핵광장의 ‘그물망 정신’

2024-12-10 13:00:10 게재

비상계엄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필자는 대전에서 세계 각지에서 모인 물리학자들과 함께 국제학술대회에 참석중이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집으로 가야 한다는 마음 한켠에 영문도 모른 채 남의 나라 계엄소식을 접한 외국 학자들을 챙겨야 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전방 부근에서 이등병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소중한 아들의 모습도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애끓는 6시간이 흘러 계엄이 해제되고 맞이한 세상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로웠다.

12월 7일. 계엄 이전 세상이었더라면 우리는 한 강의 노벨상 수상 소감 발표를 생방송으로 보고 즐거워하고 한 강의 입을 통해 얻은 아름다운 말을 SNS에서 전세계와 나누었을 것이다. 필자는 한 강이 8살에 쓴 시의 한구절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라는 말을 양자역학의 중첩과 얽힘으로 재해석해 널리 퍼뜨렸을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평온하고 따뜻한 노벨문학상 수상소감 듣기를 반납하고 국회 앞 여의도와 전국 각지의 집회장소로 달려갔다. 두터운 옷으로 떨리는 마음을 단단히 동여맨 채 각자 반짝이는 것을 손에 들고 빼앗긴 평온을 되찾고 지키기위해 길바닥에서 찬바람을 맞아야 했다.

텐서 그물망 기법을 사회에 적용하면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원자다. 수소 질소 산소처럼 친숙한 원자 말고도 100 개쯤 더 많은 원자가 있다. 물리학자들은 이런 원자를 하나씩 실험기계 속에 가두고 이리저리 건드려보며 도무지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해결해왔다.

가슴과 가슴을 연결해주는 금실이 사랑이듯 원자와 원자를 이어주는 금실은 중첩과 얽힘이다. 열개의 얽히고 중첩된 원자보다 스무개의 얽힘을 통해 중첩된 원자는 1000배의 계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서른개가 얽히고 중첩된 원자집단은 스무개짜리 집단보다 다시 1000배의 계산 능력을 발휘한다. 양자컴퓨터가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넘어 경제 금융 보안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큐빗 열개만 늘리면 능력이 1000배가 되는 성질 때문이다.

양자컴퓨터를 구성하는 원자 하나하나는 큐빗이다. 양자컴퓨터에서 작동하는 알고리즘은 큐빗끼리 서로 양자역학적인 방식으로 저장된 정보를 주고받으며 중첩이란 원리를 동원해 틀린 답은 차츰차츰 소거하고 정답만 도드라지게 만들어준다. 모든 큐빗이 다른 큐빗과 제대로 소통하는 상태를 ‘결맞는 상태’라고 부른다. 그물망의 어느 한 매듭도 찢어짐 없이 제대로 연결되어 있을 때 양자컴퓨터는 집단지성을 십분 발휘해 일반 컴퓨터가 감당할 수 없는 문제의 해답을 찾아낸다.

양자컴퓨터가 아니라도 원자가 여러개 모여 있는 집단상태의 양자 동역학 문제를 풀기 위해 오랫 동안 고민해 온 물리학자들이 개발한 방법론 중에 ‘텐서 그물망’이란 것이 있다. 원자 하나에 대한 정보를 텐서라는 수학적 구조 속에 저장하고 원자 사이에 공유해야 할 정보는 서로 다른 텐서를 그물망처럼 엮어 여기저기 분산된 형태로 저장한다는 게 텐서 그물망 기법의 정신이다. 텐서 그물망이 채용한 방법론 덕분에 그동안 풀 수 없는 난제라고 믿었던 양자 동역학 문제가 비로소 해결되기 시작했다.

그물망 기법의 총아는 21세기 인공지능 기술이다. 모든 문제를 그물망 형태로 짜여진 컴퓨터 알고리즘 속에 집어 넣고 본래 데이터에 존재했던 정보는 그물망 속 마디마다 박혀있는 ‘가슴’마다 조금씩 나눠 저장한 뒤 서로 소통하게 만들어 최상의 답을 찾아내자는 게 근본원리다.

꽤 오랫동안 컴퓨터공학의 발전은 어느 천재의 머리에서 나온 알고리즘에 따라 컴퓨터란 도구가 계산을 잘 수행해서 정답을 찾아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신경망 개념에 기반을 둔 인공지능 알고리즘에서는 창조주조차 직접 계산을 수행해보기 전까지는 어떤 답이 튀어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잘 짜여진 그물망은 그의 창조주보다 더 현명해질 수 있다.

추운 광장에서 연결되고 있는 집단감성

정족수 미달로 인한 탄핵안 자동폐기라는 결과를 듣고 밤 깊은 여의도를 떠나는 필자의 눈에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뜨개질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몇시간째 대설 추위를 견디며 광장에 앉아 있었을 여인의 표정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해보였다. ‘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는 확성기를 통해 들리는 연사의 연설이 아니어도 광장에 가로세로 반듯하게 겨우 몸 하나 가눌 정도의 그 춥고 비좁은 공간에 하나씩 앉아있던 ‘가슴’들은 서로의 섬세한 몸짓으로 눈빛으로 숨소리로 연결망을 만들고 소통하며 정답을 향한 집단감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 강의 노벨상 수상소감이 아름다웠던 이면에는 그가 그동안 겪어낸 고민의 처절함이 깔려있다. 부조리와 폭력이 산재한 세상에서 그가 본 마음과 마음을 연결한 금실 그물망이 도출한 해답은 어쩌면 ‘사랑’인듯하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세상이지만 21세기를 주도하고 있는 계산 문제 해결의 도구들이 공통으로 추구하는 그물망이란 구조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광장에서 전개되고 있다. 정보는 공유하고 생각은 나누면서 최적의 답을 찾아가는 게 그물망 정신이다.

한정훈 성균관대학교 교수

물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