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뇌썩음, 도량발호 그리고 악의 평범성
지난 2일 ‘뇌썩음(brain rot)’이 옥스퍼드 사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됐다. 인터넷 문화나 비공식 대화에서 사용되는 속어로 의학적 용어는 아니다. 소셜미디어 유튜브 밈(meme) 등 인터넷 콘텐츠를 지나치게 소비하면서 시간이 낭비되고, 정신적으로 피로감이나 무기력함을 느낄 때 이를 ‘뇌썩음’으로 표현한다. 소셜미디어에 넘쳐나는 정보가 오히려 해악이 되는 비판적 의미가 담겼다.
지난 3일 밤 군대를 동원한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전반적 인식과 12일 대국민담화는 ‘뇌썩음’을 의심케 하기 충분했다. 본인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비판 세력에 대해서는 ‘광란의 칼춤’ 등 격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선거 조작설 등 각종 음모론과 극단적 주장을 일삼는 극우 유튜버 논리와 판박이였다.
14일 탄핵이 가결된 뒤 발표한 담화문 역시 다르지 않았다. “폭주와 대결의 정치에서 숙의와 배려의 정치로 바뀔 수 있도록 정치문화와 제도를 개선하는 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주시기 바란다”는 표현에는 그동안 본인이 행한 폭주는 찾아볼 수 없다.
지난 9일 교수신문은 전국 대학교수들에 대한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의 사자성어로 ‘도량발호(跳梁跋扈)’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을 둘러싼 극한 대결국면을 상징적으로 웅변하는 단어로 평가됐다. 설문조사는 지난달 25일부터 지난 2일까지 이뤄져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바로 직전에 마감했지만 긴박한 내란사태와 너무나 맞아떨어지는 사자성어였다. 도량발호를 추천한 정태연 교수(중앙대)는 “권력을 가진 자가 높은 곳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며 주변의 사람들을 함부로 짓밟고 자기 패거리를 이끌고 날뛰는 모습을 뜻하는 고어”라고 설명했다.
비상계엄이 해제된 뒤 열린 국회 상임위와 본회의 등을 통해 국민들은 우리 군 수뇌부와 고위관료들의 민낯을 지켜봤다. 국민과 국회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위헌적 계엄에 대한 고위공직자들의 ‘나약한 침묵’과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수뇌부의 ‘무조건적 명령 복종’이 얼마나 위험천만한지 절감했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으로 설명했다.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를 연구한 아렌트는 악행은 원래부터 악한 사람이 저지르는 비정상적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지만 사유하지 않는 상태 즉 ‘생각 없음’이 도덕적 책임결여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생각없음’은 ‘도덕적 책임결여’로 이어지고 결국 끔찍한 학살을 집행한 거악의 공범이 된 것이다. 위헌적 계엄국면에서 군 수뇌부와 고위관료들은 과연 스스로 사유했는지 국민과 역사가 묻고 있다.
정재철 외교통일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