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 이후’를 생각한다 ⑤ 대통령을 움직인 ‘음모론’
“정치 양극화가 SNS를 만나 상대를 감정적으로 적대화했다”
극우·극좌, 유튜브 알고리즘에 ‘적개심’ 확대재생산
“정당, 온라인 윤리 규범 등 만들어 지지층 건강하게”
모두가 궁금해 했다. 왜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선택했을까.
지난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윤 대통령의 표정과 언어는 비장함과 확신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는 야당의 입법부 주도행위에 대해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에 의한 “내란을 획책하는 명백한 반국가 행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 기도”로 규정하고 “신명을 바쳐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낼 것”이라고 했다.
현재까지 국회 현안질의에서 나온 질의, 민주당으로 들어온 제보와 검찰·경찰·공수처 수사로 밝혀진 내용을 종합하면 윤 대통령의 계엄선포 이유는 선관위 서버를 확보해 ‘민주당 주도의 국회’를 만든 부정선거의 숙주를 확인하겠다는 것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선포 담화 발표가 끝난 지 수 분만에 정보사 요원들이 서버 확보를 위해 2층 전산실에 진입했다. 북파공작원 등으로 구성된 체포조들은 다음날 오전 5시에 선관위 직원들을 체포해 수방사 B1 벙커에 수감하는 계획을 짜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지난 12일 담화를 통해 “민주주의 핵심인 선거를 관리하는 전산시스템이 이렇게 엉터리인데, 어떻게 국민들이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있겠느냐”며 ‘계엄선포의 직접적 이유’를 드러내기도 했다. 선관위와 국정원은 윤 대통령의 주장을 즉각 부인했다.
왜 윤 대통령은 ‘부정선거 의혹’을 믿게 됐을까. 윤 대통령이 유튜브의 음모론에 빠진 영향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오랫동안 부정선거를 주장해온 황교안 전 총리의 19일 기자회견 내용은 윤 대통령의 주장과 맞닿아 있다.
2020년 치러진 제21대 총선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황 전 총리는 “부정선거는 팩트”라며 “비상계엄의 본질은 선거관리위원회 압수수색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지키기”라고 했다. 그는 “선관위 서버만이 그 답을 알고 있을 뿐”이라며 “우리나라 자유민주주의는 말기 암에 걸려있는 상태다.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비상계엄이 아니면 백약이 무효하다고 대통령이 판단할 정도”라고 했다.
◆그들만의 믿음 “원하는 대로 믿는다” = 음모론이 어떻게 대통령에까지 전염됐을까.
정치 양극화와 음모론은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상존해 왔다. 이들을 결합시켜 확대재생산시킨 건 ‘한 방향 유튜브’와 이를 유통할 수 있는 ‘쌍방향 메신저’다. 특히 한쪽의 시각만 추종하도록 강제하는 ‘알고리즘’은 ‘그들만의 생각’을 공고하게 만들었고 ‘원하는 대로 믿게’ 만들었다.
의견이나 이념이 다른 상대방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은 감정적 ‘적대감’으로 악화됐다. 국회 미래연구원은 ‘정치 양극화의 실태와 개선방안’에서 “정당 지지자들의 당파적 인식이 심화되고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이 상승해 정당간 적대적 대립이 심화되는 정치 양극화가 확대됐다”면서 “정당 활동가와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상대 정당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갖는 감정적 양극화 역시 강화됐다”고 했다. 이어 “정치 양극화의 심화로 정당 간의 타협이 사라지면서 정책 논쟁이 사라지고 정치의 사회갈등 관리 기능이 약화됐다”고 했다.
오랫동안 미래학자의 길을 걸으며 우리나라의 장기침체 가능성과 수축사회로의 진행을 예견했던 홍성국 전 의원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고 있고 이번 계엄은 알고리즘이 일으킨 최초의 계엄령일지 모른다”며 “유발 하라리는 최근작 ‘넥서스’에서 페이스북 알고리즘이 미얀마의 로힝야족의 대규모 학살로 이어진 것을 언급하며 향후 알고리즘 확산을 심각하게 우려했다”고 소개했다. 홍 전 의원은 “알고리즘이 만든 유사한 상황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 사회의 리더그룹이 알고리즘에 휘둘리면 우리의 미래는 포퓰리즘 기반의 정글이 된다”고 경고했다.
정치 양극화-유튜브–SNS-알고리즘으로 연결되는 극단적 음모론에 포섭될 가능성은 진보진영도 예외일 수 없다. 민주당 강성지지층들이 주요 유튜브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동질감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 역시 극우 보수층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김어준씨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 나와 ‘우방국 제보’를 근거로 ‘한동훈 암살조’설을 언급했던 것을 두고 ‘진보진영 음모론’ 비판이 나왔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새미래민주당은 논평을 통해 “김어준씨는 수많은 미디어와 채널들을 통해 ‘의도된’ 거짓말과 음모론을 퍼트려왔던 사람”이라며 “김어준씨의 거짓말과 음모설에 거리를 두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치인과 언론이 더 큰 문제”라고 했다.
◆이제 해법을 찾을 때 = SNS가 결합한 극단적 정치 양극화와 음모론이 권력을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실제 실행되면서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를 ‘대안을 찾는 시작점’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매체 환경의 변화는 바꿀 수 없다는 조건 하에서 온라인 공간에서의 정치적 소통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라며 “영국 노동당, 스웨덴 사민당, 독일 사민당 등 정당들이 온라인 윤리 규범을 만들어 상대 정당에 대해 혐오언어를 쓰지 못하도록 하거나 정당 자체적으로 팩트 체킹 프로세스를 가동하는 등 자신의 지지층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모색한다”고 했다. 또 선거나 제도를 통해 음모론 등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장치 마련도 고민의 대상으로 지목됐다. 서 대표는 “독일에서 나치 정당을 제도적으로 못 들어오게 만드는 것이나 프랑스에서 극좌나 극우의 진입 불가를 일종의 불문의 룰로 갖고 있는 등 민주주의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려는 정치세력에 대해 배척하는 시스템이나 문화가 필요하다”면서 “정당과 입법부 내부에서 이번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국면을 거친 후 대안을 논의해야 하는 과제”라고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