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최상목 결정 지지 … “경제, 정치와 독립 정상작동”
신년사서 헌재 재판관 임명 불가피성 강조
“경제, 정치프로세스에 영향받지 않아야”
“올해 통화정책방향 상황변화 유연 대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을 사실상 지지하고 나섰다. 대외신인도 하락을 막고 경제시스템의 정상적 작동을 위해서는 정치적 불확실성과 선을 그어야 한다는 평소 입장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이 총재는 2일 신년사를 통해 “최상목 권한대행이 대외신인도 하락과 국정공백 상황을 막기 위해 정치보다 경제를 고려해 어렵지만 불가피한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최 권한대행의 어떤 결정에 대한 입장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다만 지난 31일 두명의 헌재 재판관을 전격 임명한 것과 관련한 현안에 대해 ‘불가피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실상 지지를 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 총재는 그러면서 “이는 앞으로 우리 경제시스템이 정치프로세스와 독립적으로 정상 작동할 것임을 안팎에 알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여야가 국정사령탑이 안정되도록 협력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에 앞서 한은은 지난해 말 보고서에서 정치적 불확실성에 따른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시스템 전반이 정치적 프로세스에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이고 정상적으로 작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중앙은행 총재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현안에 대해 비교적 분명한 입장을 내놓은 것은 이례적이다. 이 총재는 평소 우리나라가 지속가능한 선진경제로 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구조개혁과 함께 경제가 정치에 의해 좌우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이 총재는 지난달 5일 계엄사태 직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도 “계엄사태 이후 해외에서 전부 대답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연락을 받았고 지금도 대응하고 있다”면서 “다행스러운 것은 계엄이 6시간 만에 해제돼 해외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해 시스템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 총재는 신년사에서 ‘창조와 파괴’를 언급하면서 구조개혁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우리나라 수출을 예로 들면서 주력상품이 반도체와 자동차 등 특정 산업에 고착된 문제를 지적했다. 주력산업에서 후발주자인 중국이 추격해오고 있지만, 지난 10년간 미래 수출을 이끌어갈 신산업을 개발하지 못했다고 했다. 예컨대 한국과 미국의 매출액 상위 15개 기업을 10년 전과 비교하면, 미국은 7개 기업이 새롭게 진입했지만, 한국은 2개 기업만 바뀌는 데 그쳤다고도 했다.
이 총재는 “슘페터가 자본주의 핵심동력으로 강조한 ‘창조적 파괴’는 창조만큼 파괴에 방점이 찍혀 있다”며 “혁신 기업의 탄생에는 혁신하지 못한 기업의 퇴출이 수반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경제에서 신성장 기업이 부족한 것은 창조적 파괴 과정에 수반되는 사회적 갈등을 관리하기 보다 안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회피해왔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이 총재는 또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2%로 이하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면서 “2%를 밑도는 성장률의 절대 수준만 과거와 비교하면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고통을 줄여주는 진통제로만 사용한다면 부작용은 더 커질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추경을 하더라도 자영업자와 소상공인과 같은 경제적 약자에 대한 지원에만 초점을 둬서는 안된다”면서 “우리나라는 자영업자 비중이 23.2%로 미국(6.1%)과 유로지역(14.1%) 등 주요국에 비해 과도하게 높기 때문에 이 비중이 점차 낮아질 수 있도록 채무조정과 전직 교육 등을 통해 보다 생산적인 부문으로 진출하도록 도와주는 구조조정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고 했다.
한편 이 총재는 올해 통화정책방향과 관련 “물가와 성장, 환율, 가계부채 등 정책변수 간 상충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향후 통화정책은 입수되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외 리스크 요인의 전개 양상과 그에 따른 경제흐름 변화를 면밀히 점검하면서 금리인하 속도를 유연하게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총재는 이밖에도 △한은 대출제도의 금융안정 역할 강화 △단기금융시장에서 무위험지표금리(KOFR) 활성화 △인공지능(AI) 모형 도입 △중앙은행 디지털통화(CBDC) 활용성 테스트 및 글로벌 프로젝트 참여 등도 적극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 총재는 한은이 이른바 ‘시끄러운 한국은행’으로 변화하는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내부 직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연구결과를 외부에 발표하는 ‘시끄러운 한은’으로 변화를 실감한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해야할 것부터 차분하게 실천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나가면 우리 경제는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만호 기자 hopebai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