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르네상스 후기미술은 전통과 혁신의 조화였다

2025-02-13 13:00:15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3)

이 글은 필자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바탕으로 했다. 글의 목적은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하는 데 있다. 그 시작으로 부활과 재생을 상징하는 르네상스 미술의 아방가르드(선구적) 역할을 한 르네상스 미술을 창조적 혁신의 관점에서 풀어보았으며, 이어 피렌체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초기 미술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천재 미술가와 거장들이 주도한 전성기 미술을 인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미술사가 E.H. 곰브리치는 ‘The Story of Art’ 서두에서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는 미술은 미술가의 창조물이기에 미술사는 곧 미술가의 인물사로 보는 관점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르네상스 3대 거장과 같은 엘리트 미술가들이 미술사를 만들어 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시대환경의 변화는 역사 문화 사회적 맥락에서 미술에 영향을 미치기에 이에 대한 재해석이 요구된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르네상스의 후기미술과 매너리즘 미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전성기 미술은 북알프스 너머의 네덜란드 남부와 현재의 벨기에 북부 지역을 포함한 플랑드르 독일 등 북유럽에 영향을 미치면서 후기미술로 변모했다. 물론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의 문예부흥 운동과 르네상스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60여 년간 이탈리아와 전쟁하면서 절대왕정 체제를 구축한 프랑스, 15세기 말 통일 후 대항해시대를 개척한 스페인, 헨리 8세 치하에서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 영국의 르네상스 미술은 회화보다는 건축이 북유럽은 건축보다 회화가 중심이었다. 이는 그리스·로마 유산이 많이 남아있던 이탈리아와 달리 북유럽은 고딕미술이 지배적이었고 민족 언어 종교적 배경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한 북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은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추구했다. 즉, 북유럽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미술과 변형이 나타나는 매너리즘 미술로 전환된 것이다. 이 두가지 경향은 동시대에 나타난 것이어서 함께 묶어 르네상스 후기미술로 보기도 하지만 르네상스 미술의 규범에서 일탈한 매너리즘 미술은 바로크 미술에 앞서 나타난 과도적인 미술사조로 보기도 한다. 필자는 그 특성에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다고 보기에 이를 분리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르네상스 후기미술은 인간의 현세적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

북유럽 르네상스 후기미술의 배경과 특징은 어떠한가? 물론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전성기 미술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북유럽도 이를 받아 드릴 대내외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첫째는 북유럽발 종교개혁이 결정적이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쏘아 올린 95개조 반박문은 로마교황과 중세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가 된 칼뱅의 구원 예정설과 직업 소명설도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둘째는 대서양 시대를 맞이한 유럽의 환경 변화다. 북유럽은 무역 상업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상인계급과 신흥계급이 미술품 의뢰자와 구매자로 대두했고 미술가는 길드, 공방의 예술가로서 플랑드르, 독일 등의 유파를 형성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성기 미술은 1520년 3대 거장의 막내인 라파엘로 사망 이후 1527년 로마 약탈, 면죄부를 대량 발행한 교황 레오 10세와 가톨릭교회의 부패 등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셋째는 인쇄술의 발달이다. 1445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1522년 루터의 성경 번역(독일어)은 인문보다는 지식과 과학이 내세관보다는 현 세관이 중시되는 근대사회의 태동을 앞당겼다. 이렇게 북유럽의 르네상스 후기미술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초기 전성기 미술과 같이 휴머니즘은 공유하지만 다른 양태로 변모했다. 즉,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이 원근 비례 명암법 등 과학적 접근방법을 통해 신화적 또는 현세적 인간의 이상미를 구현했다면 북유럽의 르네상스 미술은 인간과 인간의 현세적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미술을 추구했다.

눈 속의 사냥꾼(그림 1)

북유럽의 르네상스 후기미술은 ‘전통과 혁신’의 조화

필자는 지난해 8월 3일부터 8월 8일간 벨기에는 브뤼셀의 왕립미술관을 시작으로 브뤼허의 그로닝게 박물관 헨트 미술관 안트워프 왕립미술관 등을, 네덜란드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등을, 이에 앞서 7월 24일부터 7월 29일간은 베를린의 신국립 회화관 페르가몬 박물관 신, 구 미술관 보데 박물관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 노이에 피나코테크 미술관 등을 방문하면서 르네상스 후기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물론 루벤스 렘브란트 베르메르 고흐 몬드리안 마그리트 등 이 지역 출신 거장들의 명작이 많은 다른 미술관도 방문했으나 추후 해당 사조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북유럽 건축은 16세기 종교개혁(신교)과 반종교개혁(가톨릭)의 중심지였기에 고딕 교회도 많지만 르네상스 양식이 절충된 교회도 많아 ‘전통과 혁신의 조화’가 르네상스 후기미술의 특징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회화는 벽화(템페라, 프레스코화) 패널화(제단화) 중심의 이탈리아 미술과는 달리 유화로 그린 이젤화와 인간과 인간의 현세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초상화 풍속화 정물화 등이 많았다.

벨기에는 동화 ‘플랜더스의 개’의 무대인 안트베르펜, 북부의 베네치아로 불리는 브뤼허, 운하 도시로서 한때 플랑드르의 수도였던 헨트, 네덜란드는 공식 수도인 암스테르담, 행정수도이면서 1907년 이준 열사의 헤이그 특사파견도시였던 헤이그가 예술 도시다. 여담이지만 필자는 유럽미술관은 월요일 또는 화요일이 휴관임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노파심에서 인터넷을 검색한 것이 잘못이었다. 월요일에 문을 연다고 돼 있어 두 도시를 바꿔 갔다가 낭패를 겪고 아쉬워서 다시 찾아간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보상할 정도로 이들 도시는 중세 분위기가 남아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북유럽미술 여행을 간다면 이들 5개 도시와 인근의 동화 같은 도시 콜마르 스트라스부르를 함께 묶어 가볼 것을 권한다. 한마디로 삶이 지루하다면 요즘 말로 강추다.

아르 놀 피니 부부의 초상(그림 2)

사실적이며 혁신적인 후기미술의 대가, 브뤼헐 얀 반에이크 홀바인 등

르네상스 후기미술을 대표하는 북유럽 화가는 피터르 브뤼헐, 얀 반에이크, 알브레히트 뒤러, 한스 홀바인, 히에로니무스 보쉬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네덜란드 남부지역 출신으로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한 브뤼헐이다. 그는 걸작 바벨탑 외 플랑드르 농민들의 평범한 삶을 그린 네덜란드 속담 농가의 결혼식 등의 풍속화를 많이 남겨 별명이 ‘농민 브뤼헐’로 불렸다.

그의 대표작은 달력 연작 중 하나로 빈 미술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눈 속의 사냥꾼’(그림 1)이다. 허기진 개와 함께 발을 끌 정도로 지친 사냥꾼 3명의 고단한 귀갓길과 마을 아이들의 빙판 놀이가 대비 되는 그림이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명작이다. 대각선 구도로 을씨년스러운 겨울 분위기와 자연에서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소소한 일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그림은 풍경화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음은 벨기에 동부지역 출신으로 양감 질감 빛과 명암 풍부한 색감 덧칠과 수정 등이 가능한 유화를 최초로 발명하고 브뤼허에서 궁정화가 겸 외교관으로 활약한 얀 반에이크다. 그는 헨트 제단화 자화상인 붉은 터번을 두른 남자 등 평생 약 20여점의 걸작을 남겼는데 그의 대표작은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아르 놀 피니 부부의 초상’(그림 2)이다. 이 그림은 약혼식 또는 결혼식 그림인가, 여자 모델이 정부인인가? 여부 등을 놓고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남자는 분명히 브뤼허의 금융업자인 아르 놀 피니다. 이 그림은 도상학적으로 사실주의와 알레고리 기법을 사용한 상징주의의 완벽한 결합이다. 샹들리에 카펫 오렌지 여자의 황금 목걸이 모피 등은 부의 상징, 개는 변함없는 사랑, 볼록거울 속의 자신과 거울 위 벽면상의 ‘얀 반에이크 여기에 있었다(1434)’라는 서명은 결혼식의 증인 겸 저작권의 표시였다.

독일은 바이에른주 아우크스브르크의 화가 집안 출신으로 영국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활약한 홀바인이다. 그는 르네상스 전성기에 로마 베네치아 등을 방문 후 돌아와서 독일에 르네상스 미술을 전파한 알브레히트 뒤러 이후 북유럽 초상화를 정점으로 끌어올린 거장이다. 홀바인은 6번이나 결혼한 바람둥이 왕 헨리 8세와 그의 왕비들, 헨리 8세에게 자신을 추천한 우신예찬을 쓴 인문 사상가 에라스무스와 유토피아를 쓴 인문 철학자 토마스 모어 등의 명작을 남겼다.

대사들(그림 3)

그의 대표작은 런던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대사들’(그림 3)이다. 이 그림은 헨리 8세가 캐더린 왕비와의 이혼을 위해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를 세우기 전인 종교·반종교개혁 혼란기에 영국주재 프랑스 대사(왼쪽)와 주교 겸 특사(오른쪽)의 인물화다. 두 대사의 복장과 표정에서 세속과 종교 권력의 특성,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읽을 수 있다. 지구본 해시계 수학책 등은 지식과 과학의 중요성, 커튼 뒤의 십자가 찬송가 책은 신앙의 중요성, 부러진 악기와 왜상기법(anamorphis)으로 그린 해골 등은 덧없는 인생과 죽음의 필연성, 즉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를 상징하는 알레고리 기법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원근법 명암법 상징기법 등이 망라된 르네상스 후기미술의 진수라고 하겠다.

이처럼 북유럽 르네상스 후기미술의 키워드는 전통과 혁신의 조화였다. 미술의 대상도 키워드는 인간중심이었지만 인간 그 자체보다는 인간의 현세적 삶이었다. 이는 시대환경의 변화가 미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써 다음과 같은 시사점이 있다.

첫째, 로마교황의 몰락과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종교미술과 비잔틴미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둘째, 대서양 시대의 개막은 도시 상인, 시민계급 등 부르주아의 부상으로 초상화 정물화 풍경화 등 회화의 장르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셋째,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시대환경의 총체적 변화는 새로운 양식의 미술을 잉태하게 되었다.

그렇다. 북유럽의 르네상스 후기미술은 여전히 균형 비례 조화라는 르네상스 미술의 규범을 따랐으나 동시대 다른 한편에서는 르네상스 미술의 규범에서 일탈한 매너리즘 미술이 한때를 풍미하면서 르네상스 미술의 종언을 예고하게 되었다.

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해 한양대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