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윤석열 파면이 남긴 숙제들
120년 전인 1905년 을사년. 황성신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을사늑약 체결(11.17) 사흘 후 ‘이 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是日也放聲大哭)’라는 시론을 써 나라를 잃은 울분을 쏟아냈다. 120년이 지난 2025년 을사년 4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윤석열 탄핵으로 다시 ‘목 놓아 통곡할’ 시론을 쓰지 않게 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윤석열이 파면되지 않았더라면 2025년 을사년 또한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진 해’로 기록될 뻔했다.
윤석열 파면 후 국민들은 ‘3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하다’고 반색한다. 이제는 ‘내란성 스트레스’ ‘비상계엄 불면증’ ‘탄핵 우울증’이라는 말들도 웃으며 할 수 있게 됐다.
윤석열이 남긴 상처는 깊고 크지만,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엄중하지만 그래도 자격 없는 지도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게 만들 것이다. 탄핵광장에 울려퍼졌던 K-팝 ‘다시 만난 세계’ 노랫말처럼 “반복되는 슬픔은 이제 정말 안녕”이어야 한다.
박근혜 윤석열의 연이은 몰락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사실 윤석열의 파면은 일찌감치 예견된 결과다. 12.3 비상계엄이 위헌·위법이며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헌정질서 훼손인지는 헌재의 결정이 아니더라도 온 국민이 직관해 알고 있었다. 국민이 그에게 심리적 탄핵선고를 내린지는 이미 오래됐다.
돌이켜보면 윤석열이 나라를 이끌 깜냥이 아니었다는 게 곳곳에서 확인된다. 입만 열면 ‘자유’를 외쳤지만 정작 그는 ‘자유’라는 개념을 체화할 만큼의 철학이나 정책적 실력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공정과 상식’을 내세웠지만 그가 보여준 모습은 극우 유튜버들의 음모론에 중독돼 비상식을 상식이라고 우기는 망상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권력에 대한 경계심도, 민주주의적 소양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못견뎌했고, 사사건건 딴죽을 건다고 야당을 ‘적’으로 간주해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었다. 헌재의 지적처럼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야당과의 문제에 군을 동원해 결과적으로 ‘군과 일반 시민이 대립’하게 만든, 국군통수권자로서는 있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
그 결과가 파면이다. 박근혜식 표현을 빌리자면 ‘참 나쁜 대통령’이 ‘참 나쁜 전직 대통령’이 된 것이다. 민주주의를 파괴한 권력자는 그렇게 민주주의에 의해 단죄되는 법이다. 그것은 대한국민이 일궈온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지난 3년 집권과 탄핵심판 과정에서 윤석열이 보여준 저열한 인식과 처신이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가 몸담은 보수당, 나아가 보수 엘리트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폭주에 찍소리 못하던 국민의힘은 위헌·위법한 계엄 후 오히려 그를 옹호하면서 박정희 전두환으로부터 복제돼 이어오던 ‘내란유전자’를 다시 발현시켰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이번에 윤석열과 함께 탄핵당했다. 탄핵반대파들이 집중 지원했지만 큰 격차로 참패한 4.2재보궐선거 결과가 그 반증이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은 아직 그런 인식조차 없는 것 같다. 헌재의 결정 후에도 승복선언 없이 관저정치를 이어가는 윤석열과 절연하기는커녕 오히려 탄핵찬성파에게 화살을 돌리는 분위기다. 탄핵정국 내내 아스팔트 우파와 한통속이 돼 내란을 옹호했던 친윤중진들은 “탄핵찬성파와 함께 갈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물론“윤석열을 지키려 한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약삭빠르게 태세전환을 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이런 식이라면 국민의힘이 주권자의 선택을 받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다. 박근혜에 이어 윤석열까지 자신들이 배출한 두 대통령이 왜 연이어 버림받았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한국 보수정치의 미래는 그야말로 ‘폭삭 망했수다’다.
‘다시 만날 세계’ 주권자들은 더 당당한 대한국민이길
이제 두달 후면 새로운 리더십이 탄생하게 된다. 아마 그는 콘크리트보다 더 단단한 반대의 벽 앞에서 나랏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헌재 지적처럼 야당에 대한 ‘자제와 관용’으로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의 의사를 배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 속의 윤석열’이 또 언제 몸피를 키워 괴물의 모습으로 튀어나올지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차제에 주권자인 국민도 스스로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헌재도 “시민들의 저항 덕분”이라고 인정했듯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조기 종식시키고, 그를 파면으로 이끌어 민주주의를 지킨 것은 분명 국민이지만 주권자의 선택이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다. 괴물 윤석열을 만든 것 또한 국민이었다. 윈스턴 처칠 말마따나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게 돼 있다. ‘다시 만날 세계’의 주권자들은 진영의 노예가 아니라 K-민주주의에 걸맞는 당당한 ‘대한국민’이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남봉우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