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사랑기부제, 일본에서 배운다 | ③행정-민간 협력이 고향사랑기부제 성공 열쇠
지정기부·민간플랫폼 활성화가 성공 열쇠
지자체들 고향사랑기부제 변화 시도
'재정 결정권 국민에게' 일본사례 교훈
"우리 아이들의 토요일이 곧 사라집니다."
광주 동구가 고향사랑기부제 기금사업 중 하나로 발달장애 청소년들로 구성된 'E.T야구단' 후원을 위한 모금을 위해 내건 표어다. E.T야구단은 2016년 (사)그린라이트의 사회공헌 공모사업으로 탄생한 전국 최초 발달장애 청소년 야구동아리다. 늘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한 발달장애 청소년들이 야구를 통해 자립심을 기르고, 친구들과 단결하는 법을 배우는 의미 있는 활동이다.
하지만 이 야구단은 6년간의 그린라이트 사업이 종료되면서 운영중단 위기에 처했다. 광주 동구는 E.T야구단 운영비 마련을 위해 고향사랑기부제를 택했다. 자체 예산을 들여 지원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의미 있는 야구단 운영을 위해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보자는 취지다.
광주 동구는 E.T야구단 지원 외에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인 광주극장을 살리는 사업도 기금사업으로 추진 중이다. 행정안전부가 반대하고 있지만 이를 강행할 계획이다. 김희선 인구정책계장은 "자문변호사 법률검토 결과 지금의 법 테두리 안에서도 지정기부와 민간플랫폼 모금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다"며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지역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킬 계획"이라고 말했다.
◆행안부 반대에도 기회 엿보는 지자체들 = 이런 움직임은 이미 여러 지자체로 확산되고 있다. 전남 영암군은 지정기부를 통해 산후조리원 건립 추진을 검토하고 있다. 고향사랑기부제를 지렛대 삼아 아이 키우기 좋은 영암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대불산단에 노동자쉼터를 조성하겠다는 구상도 하고 있다. 목포에 거주하며 대불산단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잠재적 기부자로 삼아 세운 계획이다. 강원 양구는 올해 1월 제도가 도입되면서 가장 먼저 민간플랫폼을 통한 모금을 시작했다. 행안부 압박을 못 이겨 며칠 만에 창구를 닫아야 했지만 여전히 다시 시행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조인선 양구군 인구정책팀장은 "소멸위기 양구가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새로운 변화를 꾀하려면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지역을 홍보하고 국민들의 관심을 끌어모아야 한다"며 "이는 행정의 힘만으로는 어렵고,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가진 민간 영역과 힘을 모아야 실현 가능하다"고 말했다.
고향사랑e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모금방법, 즉 접수처를 늘리려는 지자체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제주도는 외지인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제주공항 내 국민은행·제주은행을 모금 접수처에 추가했다. 광주 동구는 아예 민간플랫폼을 통해 모금을 강행하기로 했다. 일부 지자체들은 오프라인으로 접수한 뒤 공식 접수처 중 하나인 농협을 통해 요령껏 접수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행안부가 허용하는 방식이 아니지만 고향사랑e음에서 벗어나 보다 편리한 모금방식을 찾고 있는 것이다. 기부자 중심으로 제도를 운영하려는 시도다.
염명배 충남대 명예교수는 "기부금을 유치하기 위한 지자체의 자율적이고 적극적인 전략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고향기부제는 성공하기 어렵다"며 "지자체는 기부자를 찾아 나서고 이들에게 감동을 줘서 보다 많은 기부금을 유치하는 능동적·적극적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중앙정부를 향해서도 "지자체를 통제하려 하지 말고 최대한의 자율성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토부도 청년창업 지원 플랫폼 구상 = 민간 영역에서도 고향사랑기부제 활용 방안을 찾고 있다. 일본 사가현에서 한 비영리민간단체가 1형당뇨병 치료제 개발을 위한 모금을 진행한 것처럼 우리도 민간단체들이 지자체의 고향사랑기부 창구를 활용해 모금을 해 보려는 시도다. 일본의 1형당뇨병 치료제 개발 모금에는 지금까지 71억원이 모였고, 도쿄대 등 연구기관에 지원돼 치료제 개발을 돕고 있다.
김동석 (사)토닥토닥 이사장은 "우리도 일본처럼 지정기부와 민간플랫폼 기부가 가능해진다면 공공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이나 휠체어그네 설치 같은 과제들을 정부나 지자체 손에만 맡기지 않고 고향사랑기부제를 통해 추진해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0년간 재활난민으로 살아온 중증장애어린이와 부모들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며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낸 바 있다. 그 덕분에 대전세종충남에 제1호 병원이 건립됐고 여러 지역에서 병원·센터 건립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건립재원 확보나 운영적자 우려 등에 가로막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공 영역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국토연구원은 최근 고향사랑e음 플랫폼의 한계를 지적하고 국토부 차원의 모금 플랫폼 구축을 제안했다. 국토연구원은 지난 5월 발행한 간행물에서 "지방 중소도시들의 청년창업을 지원하기 위해 이들에게 지정기부하고 그들이 생산한 제품을 답례품으로 제공하는 플랫폼을 구축·실행하자"고 제안했다. 국토연구원은 또 "지금의 고향사랑e음으로는 이를 구현할 수 없다"며 "국토부가 자체적으로 플랫폼을 구축한다면 특색 있는 장이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재정 운용 결정권 국민에게 줘야 = 2008년 고향납세 제도를 시행한 일본도 초기부터 활발한 기부가 이뤄졌던 건 아니다. 우선은 답례품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비영리민간단체들의 지정형 기부 제도가 생기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연간 7조~8조원 규모의 고향세가 모금된다. 민간이 사업을 기획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또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기부할 수 있도록 한 결과다. 권선필 목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기부자 입장에서 왜 기부해야 하는지 납득할 만한 기부 명분을 각 지자체가 설득력 있게 발굴해 제공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민간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적극적으로 열어줘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고향사랑기부제가 '재정주권' 문제와도 연관돼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일본의 사례에서 배울 점은 세금을 납부하는 국민이 그 사용처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라며 "고향사랑기부제는 재정의 주권을 국가에서 지자체로, 행정에서 민간으로, 결국에는 납세자인 국민에게로 돌려주는 첫 사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