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나치 치하 독일국민은 왜 유죄인가

2014-11-28 12:56:22 게재
갈라파고스 / 밀턴 마이어 지음 / 박중서 옮김 / 1만8500원

1938년 11월9일 밤. 독일 프랑크푸르트시 인근의 소도시인 '크로넨베르크'에서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다. 그 날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의 기념일이었다. 1923년 히틀러는 뮌헨 중심가에서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다가 11월9일 체포돼 투옥되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을 옭아맨 '베르사유의 사슬(베르사유 조약)'을 끊자는 히틀러의 구호는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이는 훗날 나치 집권의 기반이 되었다. 따라서 나치에게 11월 9일은 '해방절'이나 다름없었다.

크로넨베르크에서도 나치돌격대(SA) 예비군 중대원 20여명이 축하 모임을 갖고 있었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유대교 회당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예비군 중대장인 칼 슈벵케는 대원 4명을 데리고 모임터에서 떠났다.

새벽 1시25분. 자율소방대 부대장인 칼 클링겔회퍼는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화재 현장에는 경찰관이 나와 있지 않았으며 SA 대원들이 상황을 통제했다. 회당으로 다가간 순간 기름 냄새가 훅 끼쳤다. 불은 여러 장소에서 일어난, 전형적인 방화였다.

그 밤에 화염이 타오른 곳은 크로넨베르크만이 아니었다. 독일 전역의 유대교 회당이 소멸했다. 독일 국민은 나치가 유대인에게 보내는 최후통첩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일상은 흘러갔다. 이듬해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해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다.

"나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고 믿었다"

지은이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교육가이다. 아울러 독일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다. 그는 나치의 등장에 혐오감(미국인으로서), 부끄러움(독일계로서), 충격(유태인으로서) 등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지만 언론인으로서는 '매혹'을 느꼈다. 왜 독일 국민이 나치라는 집단 광기에 빠졌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7000만 인구 가운데 전면에 나서 설친 자는 불과 100만 명 정도였다.

그는 1952년 프랑크푸르트 대학 객원교수 자격을 얻어 가족과 함께 독일에 건너와 인근 소도시에 자리 잡는다. 크로넨베르크는 실제 있는 도시 이름이 아니라 그가 산 곳에 붙인 가공의 이름이다. 거기에서 지은이는 예비군 중대장 슈벵케, 자율소방대 클링겔회퍼 등 평범한 독일인 10명과 '친구'로 사귄다.

전부 나치당원이던 그 친구들과 1년 동안 깊이 대화를 나누면서 지은이는 점차 그들의 내면에 존재한 나치즘의 실상을 하나하나 깨우쳐 간다.

그들이 나치당원이 된 이유는 다양했다. 나치야말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고 믿은 이가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직장을 잃지 않거나 새로 얻으려고, 그리고 나치가 되어 곤경에 빠진 주위 사람을 돕겠다는 목적으로 입당했다.

선의 또는 사소한 이익을 지키려고 나치당원이 된 이들을 용서해야 할까. 그들은 하나같이 '작은 자'(소시민)였다. 부지런하고, 보통 정도의 지능을 가졌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나치즘이 사악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들 모두는 심지어 히틀러가 도덕적으로 악하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한 최악의 실수는 보좌관을 잘못 선택해 배반당한 일이었다(우리 역사에서 이승만·박정희 독재를 옹호하는 논리와 어쩌면 이리도 닮았는가!). 게다가 그들에게 나치 시대는 인생의 황금기였다.

지은이는 그 '부지런하고, 보통 정도의 지능을 가졌고, 정직한' 독일인 친구들에게서 진정으로 반성하는 목소리를 끝내 듣지 못했다. 나치 치하에서 행한 선택을 캐물을라치면 그들은 한결같이 되물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치와 관련해 그들이 보여준 감정은 결국 후회 비슷한 무엇에 그쳤다.

그렇다고 독일인이 다 그런 것만은 물론 아니다. 지은이의 동료 교수는 1935년 자신이 세상을 상실한 경험을 들려준다.

'국민 총동원'에 관한 법률이 생긴 그 해 화학 전공자인 그 교수는 군수품 공장에서 일했다. 법에 따라 공장 측이 충성 선서를 요구하자 거절했다. 공장 측은 하루 더 말미를 주었다. 거듭 거절하면 일자리를 잃을 테지만, 그는 외국에 나가서라도 취업할 수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고민 끝에 충성 선서를 했다. 주위에 돌봐야 할 친구들이 유태인을 비롯해 많이 있었다. 선서를 하고 직장을 지키면 나중에 그들을 도울 기회가 있으리라는 '이성적인'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제 아파트에 수배자들을 숨겨줘 여러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도 그는 충성 선서를 한 순간 '세상을 잃었다'. 자신처럼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이 선서를 거부하고, 이에 대중이 호응하면 나치의 광기를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깨달음 탓이었다. 그는 "1935년 내 믿음이 강했더라면 그 모든 악을 방지할 수 있었다."고 참회했다.

'그들이 내게 왔을 때, 나 위해 말해 줄 이 아무도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7년 후, 독일인들과 살며 그들의 속내를 파헤쳐 본 지은이는 당시 독일 국민 모두가 나치의 범죄에 공동 책임이 있다고 결론 짓는다. 그들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가해자가 아니라 자신도 피해자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소한 이익을 지키려고 공동체의 정의가 한 단계씩 무너져 내리는 걸 보면서도 외면했다. '법과 질서'라는 미명 아래 그들은 오히려 공감하고 동참했다. 그럼으로써 공범이 되었다.

마르틴 니묄러는 당시 독일에서 저명한 신학자이자 목사였다. 그는 나치 정권 초기에 히틀러와 독대해 종교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곤 한동안 나치의 정책을 지지했다.

그러다 뒤늦게 저항에 나서지만 체포돼 강제수용소에 수감된다. 그가 전후에 남긴 말은 구전되면서 여러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져 시가 되었다. 그 시는, 국가권력의 폭력이 정의를 무너뜨릴 때 인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새삼 일깨워 준다.

그들이 처음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에게 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에게 왔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유대인을 덮쳤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이어서 그들이 내게 왔을 때,/그때는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용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