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전환기 … 미국 중심 단일패권 빠르게 저문다

2016-11-17 10:53:43 게재

브렉시트·트럼프 당선, 경제와 군사 이어 마지막 남은 정치부문까지 변화

미국 대통령 당선자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주도의 일극주의를 끝낼 것인가. 트럼프 당선의 의미는 다극화 세계로의 전환이라는 분석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국제문제 전문가이자 군사평론가인 페데리코 피에라치니는 16일(현지시간) 온라인매체 '스트래티직컬처' 기고문에서 "경제와 군사 부문에 이어 정치의 영역에서도 다극화 전환이 이뤄지고 있지만 유럽과 미국의 기득권들은 여전히 새로운 세계질서를 거부하고 있다"며 "자국민을 포함한 전 세계인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든지, 아니면 변화를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

전 세계는 지금 전례없는 전환기를 마주하고 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이후 등장한 미국 중심의 일극주의는 2001년 9.11사태가 낳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최정점에 달했다. 하지만 이제 그같은 질서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트럼프의 승리는 정치적 기득권에 대한 미국민들의 단호한 거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2011년 11월 15일 미 뉴욕 커낼가 공원에서 '월가를 점령해 탐욕스런 금융권을 개혁하자'는 취지로 모인 사람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미 대선은 그 어떤 예측도 무너뜨렸다. 서구체제의 심장이자 수도인 미국에서, 트럼프는 승리했다. 대통령이 선출되는 법칙을 다시 쓴 것이다. 이번 대선이 유례없는 중요성을 띠는 이유다. 언론이나 정치인, 전문가, 지식인 등 미국의 파워를 대표하던 사람들은 대중들이 투표를 통해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를 막지 못했다.

트럼프의 승리는 미국 역사상 최대 배신자로 기록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위임된 권한뿐 아니라 부시와 클린턴 왕조도 무너뜨렸다.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적 불평등과 인종갈등, 가난과 사회적 불의를 고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당선됐지만, 모든 사안에 실패했다. 그는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이며 후원자가 됐다. 2008년과 2012년 두 번이나 오바마를 지지했으나 배신당했던 유권자들은 힐러리 클린턴에게까지 속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않았다. 이들은 애초 버니 샌더스를 마지막 희망으로 여겼지만 그는 경선에서 탈락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포기하거나 차라리 트럼프를 선택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을 포함한 워싱턴 기득권의 지배질서에 단호한 경멸감을 드러낸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30년 전보다 더 후퇴한 경제적 상황에 고통받는 노동계층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알렸다.

월가 금융모델 - 테러 악순환 전쟁모델

영국의 브렉시트 가결 투표와 필리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 당선, 2013년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확산, 프랑스의 르펜 지지현상, 그리스 좌파 시리자당의 집권 등은 일관된 맥락을 보여준다. 세계화, 국제화에 대한 거부다. 각국 정부와 기득권은 국민의 이익을 국제적 이해관계에 복속시키면서 거대한 악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2008년 전 세계를 금융위기로 몰고 간 월가의 금융모델과 전 세계에 테러의 악순환을 심는 미국의 전쟁모델은 이제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반발의 근원은 다극화에 대한 갈망이다. 일극체제에서 권력과 돈은 극소수에 집중된다. 복지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서구 시민들이 좌절을 느끼는 기본 이유다. 대중의 의지를 존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다극화다. 일극화에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 세계는 이미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무한대로 열려 있는 곳이 바로 디지털 세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일극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부적절한 이념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트럼프든 브렉시트든 대안이 절실해졌다. 최근 몇년 간 유럽과 미국에서 반 기득권 모델을 제시하는 인물들이 대중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대안으로 간주되는 이유다. 대중들에게 중요한 건 당의정을 덧씌운 메시지가 아니었다. 기성질서와 다르기만 하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대안이 되기에 충분했다.

금융자본의 힘은 사람들에게 남겨진 얼마되지 않은 권리마저 앗아가고 있다. 대신 끝모를 탐욕을 자랑하는 소수 기득권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다. 이는 서구의 많은 나라들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붕괴 직전까지 몰린 원인이다. 이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변한 건 없다. 오히려 대중들의 경제사회적 복지상황은 눈에 띄게 후퇴했다. 전례없는 수준으로까지 하락했다. 2008년 위기 이후 정치인들은 수많은 약속을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중산층과 하위계층은 지금까지 남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은 그들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보여주는 사례다.

경제적 상황뿐 아니다. 수많은 전쟁에 미국민들은 자국 정치인에 적개심을 갖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6조달러(약 7000조원) 가까운 전비를 썼지만, 워싱턴 기득권에 대한 신뢰만 무너뜨렸다. 유권자들이 자국의 외교정책에 무관심한 결과로 돌아온 것은 테러리즘의 증가와 국내투자의 감소, 무기력함의 확산이었다. 유권자들은 미국 외교정책이 해롭고 불필요하며 심지어 반생산적이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트럼프는 이같은 점을 잘 파고들었다.

언론과 기득권이 연합해 한 후보에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지만, 결국 패했다.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월가와 워싱턴 컨센서스(미국식 시장경제체제의 대외확산 전략), 민주주의 수출, 지정학적 주적에 대한 비난 등 기득권이 조작하는 이슈와 무관하게 치러질 수 있음을 전 세계는 지켜봤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의 단일패권주의가 현실의 다극주의에 무릎을 꿇었다. 처음에는 공화당 경선에서, 두 번째는 대선에서 사람들은 '당신의 오늘은 안녕하신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 그 대답은 '천만의 말씀'이었고, 이는 트럼프 투표를 통해 드러났다.

기득권이 만든 상품이자 기성질서의 대변자인 클린턴은 미국민이 원하는 답변, 즉 '엘리트와 절연하라'는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유권자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이들은 경제와 금융, 군사와 관련한 자국의 일방적 모델을 거부했다. 전 세계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변화의 희망을 갖게 됐다.

대선 이후 하룻밤 새 미국 내 분열의 골은 더 깊어졌다. 서방세계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EU가 주도하는 금융과 경제, 군사 일극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변화의 움직임 때문이다. 유럽에서 고조되는 민족주의와 초국가기구에 대한 반발, 브렉시트 투표 등 일련의 상황은 기득권층에게 경고음이었다. 미 대선결과는 유럽과 미국의 글로벌 기득권들이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경제와 군사, 금융 일극체제를 연장하려는 생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심지어 조작까지 서슴지 않았던 체제는 이제 유효성을 잃었다.

글로벌화는 엘리트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겼다. 하지만 동시에 인터넷의 확산을 가져왔다. 인터넷은 소통의 절대적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다극화 개념은 인터넷의 고유한 속성이다.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블로그를 통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게재하는 순간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게 확산된다. 일개인의 의견도 지배적 담론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됐다. 과거 대안적 의견은 지면에 실려야만 대중들이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대안적 의견도 인터넷을 통해 주류의 담론이 될 수 있게 됐다. 상업미디어가 점차 대중의 외면을 받는 이유가 되고 있다. 인터넷은 패러다임을 바꿔놓고 있다. 이는 진정한 혁명이다.

이같은 상황을 트럼프는 능숙하게 활용했다. 엘리트에 대한 미국 보통사람들의 분노와 좌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정치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품행방정과는 거리가 먼 트럼프였지만, 유권자들은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월가 금융권과 워싱턴 정가, 재벌 대기업을 향한 반감의 크기만큼 트럼프는 호감을 샀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으로 서방은 이미 세계가 다극화됐음을 실감하고 있다. 달러에 기반한 미국식 경제모델은 브릭스(BRICS)가 주도하는 국제기구들이 출현하면서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중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출범시키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위안화를 기축통화바스켓에 산입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중국이나 러시아 이란 등은 달러와 연방준비제도(연준)의 대항마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힘을 모아왔다. 석유달러가 보장해온 미국의 패권이 급격히 훼손되고 있다. 군사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더 이상 세계 유일 군사패권기구가 아니다. 중동의 현 상황이 이를 증명한다. 러시아와 이란은 미국이 주도하는 시리아 파괴를 막아내고 있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시리아는 2003년 이라크처럼 참혹한 잔해만 남은 나라가 됐을 것이다.

경제와 군사에 이어 마지막으로 남은 건 정치 부문이었다. 이마저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으로 급격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이처럼 미국의 단일 패권시대는 빠르게 저물고 있다.

'자기만의 세상'에 빠진 글로벌 기득권층

물론 트럼프의 미국이 안팎 정책을 어떻게 펴나갈지 지켜봐야 한다. 트럼프의 승리는 아직 검증과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따라서 아직까지 국제적 힘의 균형도 그대로다. 세계는 현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교차로에 섰다. 일극주의에 대한 반감과 다극주의에 대한 염원으로 표출된 미국 대선결과는 결국 유럽연합과 미국의 국제적 관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전 세계가 세기적 전환기를 맞고 있지만, 유럽과 미국의 기득권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끝까지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자국민을 포함한 전 세계인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든지, 아니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 이란 등 다극화 주체들과 권력을 나눠야 한다. 그게 최대 과제다.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브렉시트를 좌절시켜야 한다', '트럼프 당선자를 암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역사적 사례를 보면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역사적 전환의 흐름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유럽과 미국의 유권자들은 그동안 기득권이 계획한 거대한 거품 속에서 고립돼 왔지만, 이제 그 거품을 꺼뜨리기 시작했다. 수십년 동안 듣고 봐왔던 것들이 실제로는 거짓이고 편향됐으며 자신의 이익에 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그 어떤 기득권도 변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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