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

건전한 경영철학 배경, 후보자격 스스로 증명

2017-01-20 10:34:33 게재

독일 머크, 창업자 후손 입사 배제

스웨덴 발렌베리, 이익 사회환원 철저

재벌들의 불·편법적인 경영권 승계가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한국과 달리 외국에는 몇 대에 걸친 경영권 승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기업들이 다수 있다. 특히 유럽의 경우에는 4~5대 이상 세습을 했지만 좋은 평판과 탄탄한 경영체제를 유지하는 기업들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주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행사는 재벌 총수일가의 경영철학이 잘못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본주의 역사가 오랜 유럽에서 경영권을 몇 대에 걸쳐 승계한 기업들은 대부분 건전한 경영철학을 배경으로 철저한 검증을 통해 후계자를 뽑는다.

머크 파트너위원회 회장인 프랭크 스탄겐베르그 하버캄 박사가 2012년 8월 7일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집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5대에 걸친 경영권 세습에도 존경받는 회사 =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은 자동차·방위산업체 사브,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제약업체 아스트라제네카 등 세계적인 기업 19개를 소유하고 있다.

이 기업들은스웨덴 주식시장 주가총액의 40% 정도를 차지할 정도다. 특히 이 가문은 1856년 창업 이래 5대째 경영권을 세습해왔다. 현재는 창업주 오스카 발렌베리의 후손으로 사촌간인 마르쿠스 발렌베리와 야콥 발렌베리가 지주사 인베스토의 사장과 회장을 맡고 있다.

오스카 발렌베리는 해군장교 출신으로 은행업에 뛰어들어 1856년 스톡홀름 엔실다 은행(SEB, 스칸디나비스카 엔실다 은행 전신)을 창업했다. 이후 스웨덴 정부가 은행이 제조업체 주식을 장기간 보유하지 못하게 하자 지주회사격인 '인베스토'를 설립해 기업을 거느리는 구조를 만들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발렌베리 가문이 금융 건설 항공 가전 통신 제약 등 문어발식 경영을 함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 첫 번째 원인은 발레베리 가문이 기업경영 목적을 이익추구에만 그치지 않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돌려주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주회사 인베스토는 거느리는 기업들에서 받은 이익금 전액을 가문이 설립한 공익재단에 기부한다. 이 공익재단은 기업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이 2010년 11월11일 서울 광장동 쉐라톤 워커힐에서 열린 서울 G20 비지니스 서밋 인터뷰에서 답변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발렌베리 가문이 경영권 세습에도 존경받는 두 번째 이유는 후계자들을 철저한 검증을 통해 뽑는다는 점이다. 발렌베리 후계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부모 도움없이 명문대를 나와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에 취업해 실무경험을 쌓아야 한다. 노동자를 경영 파트너로 인정해 노조 대표를 이사회에 중용하는 원칙도 지키고 있다.

소유와 경영의 철저한 분리 = 독일기업 머크는 1668년 설립된 회사로 헬스케이 생명과학 기능성 소재분야에서 세계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독일 담스타트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현재 창립가문이 회사의 주요 주주로 상장주식의 70%를 소유하고 있다. 전세계 66개국에서 5만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2015년 매출은 128억유로다. 국내에도 현지법인인 한국 머크를 두고 있다.

머크는 회사 운영은 전문 경영인이 맡고 창립가문은 경영에 대한 관리 감독을 하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기업으로 유명하다. 2000년 이후 CEO CFO 등 최고경영진에 창립가문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최고경영진은 모두 엄격한 평가를 거쳐 외부에서 영입한 전문 경영인들이다.

머크가(家)의 청년들 가운데 머크 사업을 직접 경험해보기 원하는 이들에게는 단지 3~6개월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만 제공된다. 이들이 머크에서 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고위 임원이 된 뒤, 그 경력을 인정받아 엄격한 선정절차를 거쳐 고위 직급에 지원하는 방법뿐이다. 물론 지원했다고 다 뽑아주는 것도 아니다.

이웃나라인 일본은 경영권 세습보다는 전문경영인을 중용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의 대표적인 화학소재 회사인 도레이는 지난해 3월말 기준으로 재무적투자자가 39.90%의 지분을 소유하고 개인투자자도 21.65%를 갖고 있다. 이 같은 지분구조는 창업주 일가의 소유지분이 낮은 국내 재벌기업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국내 재벌기업들과 다른점은 도레이는 개인대주주가 경영권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이사회가 내부에서 단련된 인물을 CEO로 선임해 경영권을 맡겨왔다는 것이다. 현 닛카쿠 사장은 1973년 도레이에 입사해 2011년 CEO로 선임된 후 지금까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후계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 = 대만에서도 가업승계는 철저히 '능력 우선주의'다. 창업주 직계라 할지라도 능력이 검증되지 않으면 입사 자체가 불가능하다. 자칫 능력 없는 인물이 가업을 승계했다가는 회사 운명이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의 대표적인 전자업체 테코그룹의 후계자 선정은 타이완 기업들의 가업승계 과정과 문화를 잘 보여준다.

테코그룹은 1956년 5명이 공동 창업, 현재 3세대가 경영하고 있다. 후앙유진 테코그룹 IT&전자공학부문 사장도 공동 창업주 3세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일반 컴퓨터 회사에 입사했다. 이후 테코그룹에 입사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할아버지와 부친이 모두 회장을 역임했는데도 입사하지 못한 것이다. 후앙 사장은 입사한 컴퓨터 회사에서 중간간부를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헤드헌팅회사의 추천을 받아 테코그룹에 입사했다. 입사 당시 직원들은 창업주 자손인지 전혀 몰랐다.

테코그룹 경영진은 2·3세대에게 쉽게 기회를 주지 않고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외국어는 물론 중국 일본 인도 한국 등 주요 거래국가 상황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입사 후에는 다른 임직원과 동일한 경쟁을 펼쳐 능력을 인정받아야 경영진에 오를 수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이창호 조합정책실장은 "상속세 인하에 대해 부정적 의견이 있지만 기업들이 혜택 받는 만큼 자발적으로 사회에 내 놓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관련기사]
[재벌개혁, 더 이상 미룰 수 없다│②부당한 경영권 승계] "총수일가 경영독점, 경제민주화 역행"
부친 기술 승계해 전문기업으로 탈바꿈

김형수 · 고성수 기자 ssgo@naeil.com
고성수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