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5 노사정 대타협 파탄 1년 ③
"노동개혁에 새정권 명운을 걸어라"
정부·국회 역할 중요 … "새 대통령이 직접 노사정위원장 맡는 것도 방법"
올해는 파탄난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복원할 절호의 기회로 꼽힌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돼 조기대선이 치러지든, 기각돼 원래대로 가든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촛불의 영향으로 어떤 식으로건 개헌논의가 시작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사회적 대화에 대한 성찰과 대안이 나와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야 시급한 노동개혁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노사정 대화를 반면교사로 삼아 형식, 방식에 대한 고민보다는 진정한 사회적 대화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며 "사회적 합의를 국회에서 책임 있게 수용하겠다는 약속을 전제한 뒤 사회적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화 없고, 요구와 흥정만 있었다 =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참여한 가운데 노사정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을 맺고 노동계가 요구한 실업자 초기업단위 노조(산업별노조) 가입허용, 고용보험 적용 확대와 경영계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 등을 합의했다. 하지만 기업의 요구는 국회를 통과했으나 노동계 요구사항은 전면 백지화되거나 유예됐다. 더욱이 정부는 은행퇴출, 공기업 민영화 등 금융·공공부문 구조조정을 강행했다. 양대노총은 노사정위 철수를 선언했다.
이런 과정은 2015년 9·15 노사정 대타협과 파탄에서도 반복됐다. 경제주체 사이에 신뢰는 없었고, 국회는 책임을 방기했다.
권 혁 부산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지난 노사정 대타협 과정을 보면 대화는 없고 요구와 흥정만 있는 큰 단위교섭으로 또 다른 갈등의 표현이었다"며 "사회적 대화가 목적이 아닌 결과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 되면서 한순간에 빗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고 진단했다.
사회적 대화는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상대방을 사회적 파트너로 받아들이는 공감절차다. 그동안 정부는 노동개혁에 성공한 국가들의 입법내용에만 관심이 있었지, 노사관계 지형이 입법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입법효과를 어떻게 제어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선진국에서 사회적 대화, 공감대 확산 등 사회적 합의를 위한 공적 인프라에 얼마나 많은 투자와 노력이 있었는지를 간과했다.
◆불황엔 일자리 '양', 호황땐 '질' = 상호신뢰를 구축하며 사회적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독일은 좋은 사례로 꼽힌다. 독일은 산별노조와 정부, 사용자 단체의 긴밀하고 건전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사회적 파트너십을 가지고 상시적인 사회적 대화로 신뢰를 구축하며 현안을 해결에 나간다.
독일은 불황일 때는 일자리 양을 늘리는 방향으로, 호황일 때는 일자리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2005년 실업률이 2차대전 이후 최고조에 이르자, 슈뢰더 총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하르츠는 노동의 유연화로 일자리 양을 늘렸다. 이후 경기가 좋아지고 미니잡, 파견근로 확대 등 저임금 노동이 증가하자 최근엔 최저임금제도를 도입하는 등 일자리 질을 높이기 위해 노동의 유연화 규제에 나섰다.
권 교수는 "하르츠 노동개혁은 슈뢰더 총리의 결단도 있었지만 신뢰에 기반을 둔 사회적 대화의 결과물"이라며 "신뢰구축이 됐을 때 상호간의 실효성 있는 합의도출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노동개혁이 반면교사 = 반대로 우리나라 정치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노동개혁에 성공한 나라들의 경우 국정책임자가 전면에 나섰고, 때로는 정권의 명운을 걸 정도로 책임있게 밀어붙였지만 우리나라의 2번의 '노사정 대타협'에서는 대통령을 찾아볼 수 없었다.
9·15 노사정 합의과정만 하더라도 노동개혁을 노사정위에 위임했고 정부는 컨트롤타워를 한곳에 집중시키지 못했다. 정부의 참여부처도 고용노동부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기업청 등 제각각이었고 컨트럴타워는 '옥상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조 교수는 "지금처럼 노동개혁을 노사정위에게 아웃소싱(위임)하는 방식은 안된다"며 "일본 아베 총리는 노사정위원장을 맡았고 이탈리아 렌치나 독일 슈뢰더 총리는 '노동개혁 안되면 사퇴하겠다'며 자기 책임을 전제했다"고 주장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대학원 교수도 "노동개혁은 노사 양쪽의 기득권을 깨는 것이고 그 효과는 몇 년 후에나 나타난다"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은 정권의 명운을 걸고 노동개혁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와 정치, 노사관계가 비슷한 이탈리아 노동개혁이 반면교사가 된다. 이탈리아 정치권은 무능하고 부패해 경제사회의 위기극복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었다. 또한 이탈리아노동총동맹(CGIL)처럼 강경투쟁을 지향하는 노조 등 복수의 전국단위 노조를 가지고 있었고 사업장마다 노조가 난립했다. 정치나 노동계의 현실이 우리나라와 닮았다.
이탈리아는 2014년 말 개혁직전 실업률이 13%에 달하고 청년실업률은 44%에 다다랐다. 렌치 총리는 '정치개혁 없이 노동개혁 없다'며 정치와 노동개혁을 동시에 추진했다. 상원의원 의석수를 315석에서 100석으로 줄이고 해고규제 완화와 정규직 채용에 대한 재정지원 제도를 중심으로 노동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개혁의 목표를 청년 일자리 창출로 선명하게 설정하고 개혁입법을 신규 채용자부터 적용했다. 전국단위 3대 주요노조 중 CGIL를 제외하고 소극적 동의나 침묵을 이끌어냈다.
◆"레이건·대처식 일방주의 환상 버려야" = 우리나라 경제주체는 아직 1970~80년대식 노사불신에 기반 한 '착취' 또는 '쟁취'라는 오래된 구시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부도 '입법만 하면 된다'는 식의 일방통행에 익숙한 편이다.
조 교수는 "모든 노조를 등지고 정부주도로만 진행된 노동개혁은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며 "이제 1970~80년대식 미국 레이건이나 영국 대처가 했던 화끈한 노동개혁에 대한 향수를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력 대선 후보의 정책이나 공약에서부터 노동개혁에 대한 플랜을 갖게 하는 게 필요하다. 사회적 합의와 정부 책임을 미리부터 못 박아야 차기 정부에서 바로 노동개혁에 돌입할 수 있다는 얘기다.
조 교수는 "새로운 대통령이 노사정위원장을 직접 맡고 여야대표 국회의원이 참여하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며 "비정규직, 청년 등으로 참여 주체를 넓히고 어떤 합의도 재검토해 보완하거나 개선할 수 있는 열린 논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내용들이 대통령선거 공약에 담겨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