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주권재민'이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뿌리"

2017-02-28 00:00:01 게재

각계각층 시민 참여 … 민주화·적폐청산 촛불로 이어져

1919년 3월과 4월 두달간 국내외 각지에서 일어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국가의 주인이 더이상 황제나 소수의 지배층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역사적 사건이었다. '주권재민'을 주장하며 근대 국민국가 수립과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한 민족·민주혁명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만세운동에 나선 국민들은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민주공화국의 주체임을 입증해 냈다. 이러한 국민들의 뜻을 받아 민족대표들은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구상했고 그해 4월 11일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을 통해 이를 구체화시켰다.

다수의 역사학자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촛불시민혁명이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박근혜 정권 퇴진만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화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자고 강조하고 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 혁명적 사건" =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는 "3.1운동은 민주공화정의 토대 위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건립토록 했다"며 "백성이 주인이 되는 정부를 건립하자는 운동은 우리 역사에 유례가 없었던 혁명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준식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3.1운동을 계기로 우리 역사는 군주주권에서 국민주권으로, 제국에서 민국으로 바뀌었다"며 "이는 촛불시민들이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국민들 힘으로 나라를 다시 바로 세우겠다며 광장으로 나온 것과 같은 의미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며 지난 4개월간 촛불을 들고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함성과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3.1 운동과 촛불시민혁명의 배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치하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3.1운동을 일으켰던 당시 국민들과 서민들의 생존기반을 옥죄며 국민을 무시하고 국정을 농단한 박근혜 정권 밑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며 촛불을 들고 나온 광장의 시민들은 비슷한 처지라는 얘기다.

임경지 민달팽이 유니온 위원장은 박근혜정권 4년에 대해 "청년들이 말하는 헬조선이라는 말은 비단 청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면서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도 단 한 명도 못 구한 정부, 온 국민이 반대하는 국정 교과서 강행하는 정부, 위안부 피해 생존자를 외면한 정부, 비싼 집값 유지하며 세입자 내모는 정부에 신음하며 국민들의 일상은 붕괴됐다"고 지적했다.

국민들의 대한민국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 = 3.1운동과 촛불혁명은 시위기간과 지역, 참여주체 등에서도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박은식 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46년)에 따르면 3월 1일 당일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서울을 포함한 8~9곳이다.

첫날 만세운동에 이어 그 이튿날에는 함흥, 해주 등지로 확산됐고 사흘 째 되는 3월 3일에는 고종의 인산일(장례식)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개성, 사리원 등 전국적으로 만세시위운동은 퍼져나갔고 4월말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시위는 총 2000(일제측 1524)회가 넘었고 시위참가자는 연인원도 202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3.1운동 시위에는 조선8도, 한반도 전역에 사는 국민들이 참여했다. 또 만세운동은 국내 뿐 아니라 만주, 연해주, 미주까지 국외로 이어졌다.

촛불시민혁명은 지난 10월 29일 3만명에서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4개월간 연인원 13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단일의제로 집결한 역사상 최대 인원이 모인 사례다. 해외 곳곳에서도 많은 교민들이 촛불을 밝혔고 해외언론들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평화시민혁명이라고 감탄했다.

각계 각층을 망라한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했고 대한민국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는 것도 3·1운동과 촛불의 비슷한 점이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두 달간 계속된 3.1운동은 전민족적 항쟁이라고 할 만큼 계급과 계층을 망라했으며 도시와 농촌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전개됐다"며 "신분은 물론 빈부·귀천·남녀를 불문하고 인민 모두가 민족의 독립을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촛불혁명으로도 이어져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세대·지역·이념의 차이를 넘어 광장에서 국민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준식 연구위원은 "시위 참여주체도 3.1운동 당시에는 일부 극소수 친일파를 제외하고 각계각층 모든 국민들이 전국적으로 참여한 것과 같이 촛불집회에는 친박 세력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이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며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고 분석했다.

청소년들이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에 주역으로 참여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이 쓴 '3.1운동의 얼, 유관순'에 따르면 당시 10대 소녀들은 치밀하게 만세 시위를 준비했고 만세운동 현장에서 시민들과 함께 했다.

촛불집회에도 중고생 교복부대가 등장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난 청소년들은 "3.1운동을 이끈 16세 유관순 열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대구 고등학생 의거,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계엄군의 총칼에 맞선 중고생들이 있었다"며 "어려움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고 헬조선에서 과열된 입시경쟁, 취업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을 구하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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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숙 기자 ky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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