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고문당한 사상 초유의 사건
"커피가 흘러 와이셔츠 적시는 것도 몰라"
전두환 신군부, 대법관 보안사로 연행해 고문
김재규 '내란목적 살인죄' 적용 반대한 대법관에 보복
양삼승 변호사가 쓴 '권력, 정의, 판사-폭풍속을 나는 새를 위하여'(까치글방)를 보면 보안사 군인들이 대법관을 연행해 고문한 후 강제로 사직시켰던 충격적인 사실이 나온다.
당사자는 1969년 9월에서 1980년 8월까지 11년간 대법관을 지냈던 고 양병호(2005년 작고) 변호사다. 그가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된 것은 1980년 8월 3일이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을 잔인하게 짓밟은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가 양 대법관을 연행한 이유는 김재규사건에서 '내란목적 살인죄'가 아닌 '살인죄'로 소수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당시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대해 내란목적 살인죄를 적용하느냐, 아니면 일반살인죄를 적용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현직 대통령을 살해한 행위는 양형상 최고형인 사형이 불가피했지만, 정치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신군부는 정권의 정통성을 주장할 논거를 마련하기 위해 '내란 목적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신군부가 나섰다'는 명분을 위해 '내란목적 살인'이라는 공소사실을 대법원으로부터 인정받는 게 그들에게는 절체절명의 필요성이 있었다.
대법원은 8대 6의 의견으로 '내란목적 살인죄'로 판결했다. 소수의견을 낸 6명의 판사들은 '김재규를 포함해 10명 내외의 사람이 저지른 총격사건은 내란죄에서 말하는 폭동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을 냈다.
신군부는 소수의견을 낸 6명의 판사들을 제거하기로 다짐했다. 가장 큰 수모를 겪은 판사가 당시 양 대법관이었다.
양삼승 변호사는 책에서 "정보기관이 그 제거대상자를 축출하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우선 여자관계를 들추어 파렴치범으로 몰고, 다음에는 금전관계를 캐내어 부도덕한 인물로 만들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물리적 고문을 가하여 파멸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 판사에게 첫 번째 수단이 동원됐다. 당시 서일교 법원행정처장이 대법원장 공관을 찾아 "양 판사가 6.25 당시 여자관계가 있었고 사생아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를 자식으로 인정안해 말썽이다. 이 사실이 공개되면 대법원 망신이니 조용히 해결하라고 안기부에서 연락이 왔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닌 날조로 드러나 여자관계를 내세운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부도덕한 금전관계도 나타나지 않자 보안사는 물리력을 동원했다.
서빙고분실로 그를 연행했다. 양삼승 변호사는 "그는 밀폐된 공간에서 고문을 당하고 결국 강요된 사표를 자필로 작성해, 이 사표는 군인 손을 거쳐 법원행정처장에게 전달됐고 다시 대법원장에게 제출됐다"며 "그러면서 '이걸 대법원장이 수리해주어야 양 판사가 나올 수 있다'고 해서 대법원장은 어쩔 수 없이 사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양삼승 변호사는 이어 "그러고 나서 한 시간도 안돼 양 판사가 대법원장실에 나타났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면서, 헛웃음을 터뜨리며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마시던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지 않고 목덜미를 거쳐 가슴으로 흘러내려 와이셔츠를 적시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정신나간 사람처럼 눈에 초점이 풀려 있었다"고 전했다.
나머지 소수의견을 낸 판사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1980년 8월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서윤홍 등 4명의 대법관들도 임의로 사표를 제출하는 형식으로 사표가 수리됐다. 소수의견을 낸 6명 중 1명인 정태원 대법관은 사표를 내지 않고 판사직을 유지했다. 그의 소수의견을 보면 '부수적 피고인의 부수적 쟁점에 대해서만 그것도 인용형식으로 가담했기 때문에 정상이 참작됐다'는 것이다.
김재규 내란음모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사법부의 독립은 신군부의 군화발에 철저히 유린당했지만 당시 사법부 수장인 이영섭 대법원장은 온전히 그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더 부끄러운 사법부의 민낯은 김재규 내란음모사건 판결문이 10년이 지나도록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법원 판결이 내려지면 주요 판결은 바로 인쇄돼 한달에 두 번 간행되는 '법원공보'에 실리는데, 어찌된 일인지 1980년 5월 20일 선고는 10년이 지나도록 법원공보나 다른 어느 인쇄물에도 실리지 않았다.
이 판결은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세상이 바뀐 후인 1990년 8월 간행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에 10년 만에 처음으로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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