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고니의 호수 #미투

2018-04-20 10:56:19 게재
강정화 변호사 / 한국사내변호사회 문화분과 간사

반팔을 입고 있었던 여름 무렵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놀고 있던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에게 어떤 아저씨가 다가왔다. 자신을 옆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학교에 같이 놀러가자고 했다. 순진한 꼬마아이는 별 의심 없이 따라가게 된다. 그 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저씨는 학교 건물 뒷편을 소개해 준다고 했다. 뭔가 이상하고 무서운 기분을 느낀 아이는 "날씨가 너무 더운데 아이스크림 사먹어요"라고 말하며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고, 그가 문방구에 아이스크림을 사러 들어간 바로 그 때,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된다.

바로 필자의 경험담이다. 필자는 다행히도 화를 면했지만, 믿었던 성직자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가엾은 소녀 피놀라가 있다. 피놀라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연출가 겸 안무가 마이클 키간-돌란(마이클)이 재해석한 현대무용 '고니의 호수'(Swan Lake/ Loch na hEala)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고전발레 '고니의 호수' 재해석한 현대무용

이 작품은 2016년 10월 더블린 연극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후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았으며, 영국 언론 더 가디언(The Guadian)으로부터 별 다섯 개 만점을 부여받고, 2017년 영국 내셔널 댄스 어워즈 '베스트 현대무용 안무상'까지 수상한 완전히 핫(hot)한 작품이다.

차이콥스키 음악과 고전발레로 유명한 '고니의 호수'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마이클의 '고니의 호수'는 단순한 현대무용이라기보다 정확히는 연극, 현대무용, 라이브 연주, 첼로, 니켈하르파 스웨덴 민속 현악기, 노래가 어우러진 종합극이다. 배경도 지그문트 왕자가 살고 있는 왕궁이 아니라, 시멘트 벽돌이 널브러져 있는 현대사회다. 고전 발레 '고니의 호수'에서 큰 서사를 가져왔고, 아일랜드의 전설 '리어의 아이들'(The Children of Lir), 2000년 아일랜드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 카티 사건'(27세의 청년 존 카티가 강제이주 문제로 공권력에 대항하다 무장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여 논란이 된 사건)도 일부 차용했다.

공연은 시작부터 파격적이었다. 팬티 차림의 노배우가 목에 밧줄이 묶인 채 콘크리트 벽돌 주위를 계속 돌면서 염소 울음소리를 낸다. 이후 그는 변사가 되기도 하고, 소녀들을 성추행하는 성직자, 부패한 정치인, 폭력적인 경찰 등 1인 5역을 연기하며 작품을 이끈다.

피놀라를 성추행한 사람은 바로 믿고 따르던 마을 성직자 로트바트. 로트바트는 소녀에게 "너는 나를 나를 용서해야만 해"라고 소리치며, 자신의 추행사실이 밝혀지지 않도록 소녀와 그 여동생 3명을 고니로 만들어버린다.

또 다른 주인공은 직업도 없이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36세의 우울한 청년 지미다. 지미는 정부의 주택정책으로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집이 철거되려 하자 실의에 빠져 호수에서 자살하려 한다.

그 때 네 마리의 고니들을 만나 피놀라와 호수에서 춤을 추며 사랑에 빠진다. 행복한 순간도 잠시, 정부 정책에 따르지 않았던 지미는 부패한 정치인과 공권력 남용으로 경찰의 총에 맞아 결국 호숫가에서 사망하게 된다.

모두 부활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카타르시스 경험

'현대무용은 난해하다'라는 편견을 매우 잘 깨부순, 아름답고 혁신적인 작품이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죽었던 지미와 고니들이 부활하여 함께 즐겁게 춤출 때, 무려 6Kg의 하얀 깃털이 무대 전면에서 객석으로 눈 날리듯 내리는 마지막 장면이다.

공중에서 부유하는 흰 깃털은 빠르고 유쾌한 댄스를 추는 무용수들과 대조되어 마치 시간이 멈추거나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은 몽환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지미와 고니의 죽음으로 비감(悲感)에 젖어 있던 관객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강정화 변호사 / 한국사내변호사회 문화분과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