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여는 책 | 나무에서 숲을 보다
현미경을 들고 숲을 탐구하다
데이빗 소로의 '월든'과 같은 철학적 사색은 없다. 알도 레오폴드의 '모래땅의 사계'와 같은 드라마틱한 서사도 없다. 그러나 그 어떤 과학책보다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세계적 삼엽충 전문가 리처드 포티는 박물관에서 은퇴한 후 런던 교외의 5000평짜리 조그만 '너도밤나무' 숲을 샀다. 이 책은 그 숲을 관찰한 1년 동안의 기록이다.
'구상난풀은 기막힌 삼각관계의 정점에 서 있다. 너도밤나무는 햇빛과 비를 재료로 작업한다. 그리고 뿌리에 사는 균류(버섯) 파트너가 이국적인 필수 영양분을 탐색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수정난풀속 식물은 바로 이 균류에 기생한다. … 매년 꽃을 피울 필요도 없다. 나무나 균류의 상황이 좋지 않다면 해를 거르고 … 이제는 유령처럼 보이는 변덕스러운 출몰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유령은 늘 그 자리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 6월 '유령, 그리고 삼각관계' 중에서
6월에 그는 5000평짜리 작은 숲에서 영국에서 가장 희귀하다는 '유령란'(Epipogium apbyllum)을 찾아낸다. 그는 이 수정난풀속 식물이 크게는 진달래과에 속하며 전 세계적으로 약 4000종이 퍼져 있다는 것, 모두 균류에 편승하는 기생식물이라는 것, 구상난풀은 '비듬테두리송이'라는 평범해 보이는 버섯에 기생한다는 사실까지 밝혀낸다.
포티는 이 책에서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함께 엮어낸다. 이를 위해 2000년 이상 된 고고학적 유적을 찾고 각종 나무 가구부터 천막용 나무못 제작에 이르기까지 숲의 오랜 변천사를 공부한다.
자신의 숲에서 벤 나무로 그릇과 숲 수집품(채집 샘플) 보관함을 만들고 숯 제조과정을 체험한다. 숲속 나무들이 지금까지 어떤 역사적 사건을 목격하고 어떤 밀담을 엿들었을지 상상한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아 넘기지 못하는 포티는 과학자 특유의 기질에다 문학적 재능을 한껏 드러낸다. 때론 시니컬하게 말하지만 숲속에서 구할 수 있는 열매 나물 등으로 요리하는 자신만의 조리법을 살짝 알려주기도 한다.
이 책은 단순한 숲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한 관찰이나 사고에 머물지도 않는다. 포티는 틀에 박히지 않고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자기가 알 수 없는 동식물에 대해서는 망설이지 않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다.
물론 그 기록은 더없이 꼼꼼하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분자 수준의 균류도 결코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들의 세계에서 지금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지 들여다보는 것도 무척 흥미롭다.
'기후변화가 가속화된다면 결국 너도밤나무의 오랜 지배도 끝날 것이다. 내 개인적인 호불호와 상관없이 이 작은 숲은 하나로 묶인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이고, 드 그레이 시대 이후로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다.…'
- 3월 '다시 시작' 중에서
4억년 전 석탄기 때 나타난 식물들은 80%에 이르는 대기중 이산화탄소를 체내에 흡수해 가두고 산소를 내뿜어 지금의 대기상태를 만들었다. 그 이후 지구상의 식물들은 점점 크기가 왜소해지는 퇴화 과정에 놓여 있다고 한다. 쥐라기 때까지만 해도 고사리의 평균 지름이 30cm 정도였다니 그럴 만도 하다.
마지막으로, 5000평의 작은 인공숲에서 발견한 영국 학자의 지혜와 수만평의 원시림을 일거에 베어버린 가리왕산의 어리석음이 크게 비교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