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한국 독립운동의 성지 경북 안동시
독립유공자 11명 배출 임청각, 애국교육의 상징
문재인 대통령 '지도자 책무 실천 상징'
하계마을, 이만도 3대 독립운동가 배출
경북 안동시 법흥마을의 임청각에는 최근 일반시민과 군인 학생들은 물론 정부 주요인사들까지 방문객이 줄을 잇고 있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면서 새삼 주목을 받아 애국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취임후 2017년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무려 아홉 분의(현재는 11명)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공간"이라며 임청각을 언급했다. 지난달에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임청각을 상징하는 대표인물인 석주 이상룡 선생의 독립운동 과정을 직접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았기에 이상룡 선생의 후손들은 가난에 시달리며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며 "반 토막 난 임청각은 그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지난 2016년 5월에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임청각을 찾아 방명록에 '임청각의 완전한 복원을 다짐합니다'라고 썼다.
◆임청각,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 임청각은 안동시내에서 낙동강변을 따라 안동댐으로 가는 법흥동의 강변 경사지에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족과 가산을 바치며 몸부림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의 보금자리다. 법흥동은 고성 이씨가 500년을 살아온 집성촌이다.
임청각은 모두 99칸의 한옥으로 알려져 있다.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과 안채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등이 영남산과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배산임수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이 증이 터를 잡았고 1519년(중종 14년)에 낙향한 아들 이 명이 지었다. 당시 99칸이었으나 현재는 60여칸만 남아있다. 일제가 임청각의 민족정기를 끊기 위해 앞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도를 깔면서 훼손됐다.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일가의 독립투쟁사를 접하게 되면 저절로 고개 숙여진다.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현충시설(2009년 5월 25일 지정)이다. 이상룡을 비롯 동생 이상동 이봉희,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이병화, 당숙 이승화 등 9명이 독립운동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지난해 광복절에는 석주의 손자 이병화의 아내이자 손자며느리 허 은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지난 3.1운동 100주년에는 선생의 부인 김우락 여사가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돼 임청각 출신으로 11번째 독립유공자가 됐다.
지난달 28일 이낙연 총리가 임청각을 방문해 아들 이준형의 아내이자 석주의 며느리인 이중숙 여사를 언급해 독립유공자 추서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법흥마을 임청각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이상룡은 의병항쟁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09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자 안동 내앞마을 김대락과 청장년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해 독립기지 건설에 나섰다. 김대락은 석주의 부인 김우락(1854~1932)의 큰 오빠다. 아들 이준형은 당시 30대 중반이었다.
석주는 만주에서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동하다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일제와 맞서다 1932년 길림성 서란현에서 순국했다.
석주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면서 가족생계를 책임진 아들 이준형은 1911년 만주로 망명했다가 석주 순국 후 가족들을 데리고 안동 임청각으로 돌아왔다. 이준형은 자결하기 전까지 일제의 감시와 고문, 변절 협박에 시달렸다. 일제의 중앙선철도 건설로 임청각 30여칸이 잘려나가는 모습도 목도했다. 그는 1942년 6월 석주의 문집 '석주유고'를 마무리하고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산다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 보탤 뿐이다"라는 유서를 아들 병화에게 남기고 암동댐 수몰지역인 월곡면 도곡리 범계정에서 동맥을 끊어 자결했다. 석주의 손자 이병화는 만주에서 대한통의부 한족노동당 고려공산청년회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1934년 5월 청성진 경찰주재소 습격사건과 관련 체포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종부 김우락, 이중숙, 허 은 등이 가정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내는데 일조했다.
◆하계마을, 20여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 경북 안동에는 나라를 위해 희생한 전통마을이 많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상당수 마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이전됐다.
임동면의 무실마을(전주 류씨 동성마을), 와룡면의 안동 군자마을(광산 김씨 동성마을), 도산면의 하계마을(진성 이씨 동성마을), 예안면의 부포마을(진성 이씨 동성마을)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하계마을은 향산 이만도(1842~1910)에 이어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안동시청에서 북쪽으로 28㎞ 정도 떨어진 퇴계종택과 이육사문학관 중간 지점에 있었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2004년에 세워진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가 마을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하계마을의 독립운동은 1896년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1910년 목숨을 끊는 자정순국, 만주지역의 독립군 기지건설, 비밀결사 대한광복회 참가, 1919년 3.1운동과 파리장서의거, 1920년대 제2차 유림단의거와 신간회 안동지회 참여,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그리고 마지막으로 1940년 창씨개명 반대까지 끊임없이 전개됐다.
이만도 일가는 3대에 걸쳐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이만도는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24일 동안 단식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1905년 '박제순-하야시 억지합의'(을사늑약)가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 '청참오적소'에서 "왜적을 물리치기에 앞서 먼저 을사5적의 목을 베라"고 주장했다.
아들 이중업은 김창숙(경북 성주)과 함께 1919년 파리장서를 주도했다. 이중업의 부인은 내앞마을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 김 락이다. 김 락은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군 수비대에게 끌려가 두 눈을 잃었다. 김대락의 다른 여동생 김우락은 석주의 아내이다.
손자 이동흠·종흠 형제는 대한광복회와 제2차 유림단의거에 참여해 군자금을 모집했다. 동생 이만규가 파리장서에 서명했고 손녀사위 김용환(서후면 금계마을)과 류동저(임동면 무실마을)도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1910년 자정순국한 이중언과 1911년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한 이원일도 하계마을 출신이다. 이동봉 이비호 이용호 이극호 이호준 이기호 등은 1919년 예안면과 도산면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또 1931년 조직된 안동콤그룹에서 이발호·이 필 등이 활약했으며, 1940년에는 이현구가 창씨개명을 반대하며 자결했다.
수몰로 사라진 하계마을에서만 20여명의 독립운동 유공자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