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출시 쉬워졌지만 글로벌 브랜드 구축은 더 어려워져

2020-01-29 11:44:47 게재

영국 '이코노미스트'

제프 레이더와 앤디 카츠-메이필드는 2013년 남성 면도기 시장에서 틈새를 포착했다. 많은 남성들이 면도날이 주렁주렁 달린 값비싼 면도기에 질려 있었다. 기술과 글로벌 상업 환경 발전으로 이들은 괜찮은 품질의 면도기를 값싸게 공급할 업체를 찾을 수 있었다. 판매 부서 이외의 경영지원부서는 외주를 줬다. 홍보는 소셜미디어를 통한 바이럴 마케팅으로 갈음했다. '쇼피파이'(Shopify) 등 전자상거래 플랫폼, '스트라이프'(Stripe) 등 간편결제 시스템 덕분에 인터넷을 통해 고객에게 직접 물건을 팔 수 있었다. 이들이 창업한 기업 '해리스'(Harry's)는 현재 22억달러 규모 미국 남성 면도기 시장에서 4.3%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유러모니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면도기의 대명사 질레트의 시장점유율은 2009년 73%에서 현재 53%로 줄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최신호에 따르면 해리스와 같은 스타트업의 성공 스토리가 늘어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소매 판매 다국적 기업의 경영진은 좌불안석이다. 지난해 프록터앤드갬블(P&G)은 질레트 가치를 80억달러로 추산하면서 '최선의 상황이 아니다'라는 점을 인정했다. P&G는 2005년 질레트를 570억달러에 인수한 바 있다. 전 산업에 걸쳐 신흥 브랜드가 기존 다국적 기업의 몫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설립 15년 된 기업 '초바니'(Chobani)는 미국 요거트 시장에서 20%를 점유하고 있다. 저칼로리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헤일로 탑'(Halo Top)은 2012년 창립했다. 2017년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파인트 아이스크림 제조사로 올라섰다. 전통의 강자 하겐다즈와 벤앤제리스를 제친 것. 2008년 무명에서 재기한 '로단앤필즈'는 3년 연속 미국 스킨케어 화장품 1위를 달리고 있다.


2005~2015년 미국시장에 신규 진입한 비식료 제품 브랜드는 연 평균 1만9000개다. 이전 10년(1995~2005년)엔 1만1000개, 그 이전 10년(1985~1995년)엔 3500개였다. 리서치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과 IRI에 따르면 2013~2018년 군소 소매 브랜드가 앗아간 거대 다국적 기업 매출은 약 200억달러에 달했다.

전통 강자들을 위협하는 도전자의 성공 스토리는 대부분 브랜딩이 주효했다는 분석이다. 브랜드는 유래와 품질의 지속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제품의 생산자 혹은 판매자가 제품이나 서비스를 경쟁자들의 것과 차별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독특한 이름이나 상징물의 결합체다. 기업들이 소비자의 신뢰를 얻어 그에 따라 가격 프리미엄을 얹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요소다. 단골을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과거에도 많은 경쟁 브랜드가 있었다. 그때와 오늘날이 다른 점은 브랜드에 스토리가 더해진다는 것.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건 어렵다. 하지만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아디다스'나 '자라'처럼 일반 명사처럼 된 브랜드를 갖고 있는 기업들은 브랜드가 쏟아지는 요즘 현실에 당연히 걱정이 많다. 하지만 브랜드 출시가 쉬워졌다고 해도 글로벌 거대 기업과 브랜드를 구축하는 건 사실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스타트업들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는 건 사실이지만 기존 강자들이 갖고 있는 구조적 강점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광고쟁이에 열광하다

해리스 대표 레이더와 카츠-메이필드는 창업 초기 미국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브랜드 에이전시 '미쏠로지'(Mythology)를 찾아갔다. 제품과 관련한 스토리를 만드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미쏠로지 대표 앤서니 스페르두티는 "이름과 로고, 포장 차별화 등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며 "브랜드 관련 작업은 협업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해리스는 면도기를 파는 게 아니라 '단순함'을 판다고 설명한다. 고객이 온라인으로 신청하고 정기적으로 면도기를 배송 받는다. 그리고 좋은 느낌을 판다. 해리스는 매출 1%를 남성 건강 관련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레이더 대표는 "미쏠로지를 통해 얻은 중요한 통찰은 사람들에게 해리스의 존재를 믿게 하려면 사람들이 우리를 개인적으로, 창업자로 믿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해리스의 첫 광고는 나와 공동대표 카츠-메이필드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다"고 말했다.

스타트업의 브랜드를 위해 '진정성'(authenticity)을 만들어내는 일이 뉴욕에서 번창하는 가내공업이 되고 있다. 미쏠로지 건물 인근엔 '진 레인'(Gin Lane)이라는 브랜드 에이전시가 있다. 해리스는 물론 최신 샐러드 체인점 '스위트그린', 철저한 투명성을 약속하는 의류업체 '에버레인'(Everlane)과 협업하는 곳이다. 브루클린 이스트리버를 가로지르면 수십곳의 스타트업 고객을 보유한 에이전시 '레드 앤틀러'가 있다. 매트리스 제조사 '캐스퍼'와 운동화 제조사 '올버즈', 온라인 구멍가게를 표방하며 브랜드가 없는 상품을 주로 판매하는 '브랜드리스' 등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미쏠로지 스페르두티 대표는 "한달에 약 100건의 의뢰를 받는다"며 "그중 2개 정도만 선택한다"고 말했다. 레드 앤틀러 대표인 J. B. 오스본은 "매달 150명의 고객들로부터 요청을 받지만 4곳 정도와 협업한다"고 말했다. 스타트업들은 이들의 스토리텔링 서비스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사례비로 주식을 선뜻 내어줄 정도다. 진 레인은 자체 브랜드 '패턴 브랜드'를 통해 지난해 8월 첫 번째 작품인 '이퀄 파츠'(Equal Parts)를 출시했다. '사람들이 주방에서 위로를 받고 직관력을 얻도록 하겠다'는 컨셉트로 만든 요리도구 등을 판매한다. 매출 1%를 지역 공동체에 기부한다.

소비자들은 점차 '브랜드 목적'(brand purpose)에 신경 쓴다고 한다. 이퀄 파츠와 같은 스타트업들이 매출의 1%를 공익적 목적의 활동에 기부하는 것도 브랜드 목적에 해당한다. 안경제조사 '와비 파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안경을 나눠준다. 다른 기업들은 탄소발생량을 최소화하거나 지역 특산품만 사용한다. 21세기 들어 거대 브랜드 기업들은 환경운동가와 진보 논객들에게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브랜드는 자체적으로 활동가 또는 논객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의 PR컨설팅사 에델만은 미국과 영국 중국 인도 등 8개국에서 브랜드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의 2/3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브랜드의 입장을 고려해 구매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은 사회적 악영향을 해결하는 데 브랜드가 정부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답했다. 이들 상당수는 정부를 '고장난 기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다른 PR기업 콘 커뮤니케이션스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3/4는 이민이나 총기규제, 동성애자 권리 등과 같은 논쟁적 이슈에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기업 브랜드를 구매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브랜드 목적과 진정성은 환경을 오염시킨 역사적 과오가 없는, 또는 노동자를 학대한 과오가 없는 젊은 브랜드 기업에겐 상대적으로 획득하기 쉬운 가치다. 반면 전 지구적으로 어필하는 기존의 거대 다국적 기업들에겐 커다란 도전과제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질 에이버리 교수는 "거대 기업들이 목적에 기반한 브랜드 메시지를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매출을 올리는 게 아니라 현재만큼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도브비누와 립튼티, 벤앤제리스 등 생활가정용품을 판매하는 유니레버 CEO 앨런 조프는 지난해 "목적이 없는 브랜드에겐 장기적 미래가 없다"며 "하지만 '깨어있는 척'(woke-washing) 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사리에 밝은 소비자들은 이를 즉각 알아챈다"고 말했다. 펩시콜라는 2017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항의를 쾌활한 톤으로 묘사한 광고를 내보냈다가 즉각 철회했다.

공익에 동참하는 효과를 내려면 비용이 따른다. 일부 전통 브랜드 기업은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 월마트는 매장 직원에게 평균 시간당 15달러를 지불한다. 이 중 일부는 사실 마케팅 비용으로 볼 수 있다. 유럽 저가항공사 '이지젯'은 1년에 3000만달러 정도를 들여 자사가 발생시킨 탄소를 상쇄하는 일에 쓴다. 2018년 델타항공과 렌트카업체 헤르츠는 플로리다주에서 학교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한 이후, 전미총기협회(NRA) 회원에 대한 할인을 삭제했다. 총기소지를 지지하는 수백만명의 고객으로부터 대규모 불매운동이 일어날 위험을 감수하는 비용을 치렀다.

나이키는 인종차별에 항의한 뒤 사실상 은퇴상태에 놓인 혼혈 미국프로풋볼(NFL) 선수 콜린 캐퍼닉을 소환하는 전략을 선보였다. 자사의 '저스트 두 잇'(Just do it) 캠페인 30주년 기념 광고에 캐퍼닉을 기용했다. 이는 매우 높은 리스크를 수반하는 동시에 매우 높은 보상이 따르는 과감한 조치였다. 중년의 백인 보수주의자도 운동화를 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키 구매자들은 젊고, 백인이 아니며, 따라서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캐퍼닉에 동조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기에 가능한 광고였다.

거대 브랜드 기업들의 또 다른 전략은 경쟁 스타트업을 통째 사들여 진정성을 드러내는 어려운 일을 맡기는 방식이다. 쉬크 면도기를 만드는 '에지웰'은 지난해 14억달러를 들여 해리스를 인수했다. 에지웰은 "해리스의 브랜드 구축 능력을 높이 샀다"고 밝히면서 창업자 레이더와 카츠-메이필드를 미국 법인 대표로 임명했다. 유니레버는 2016년 10억달러를 들여 해리스의 경쟁기업인 '달러 쉐이브 클럽'을 사들였다. 세계 최대 맥주 제조사 앤호이저-부시 인베브는 '캠든 타운 브루어리'와 '구스 아일랜드' 등 수제맥주업체들을 잇따라 인수했다.

일부 다국적 기업들은 스스로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 아마존은 십여개의 브랜드를 갖고 있다. 의류에선 '굿쓰레즈', 건강식품에선 '솔리모' 등이다. 월마트는 매트리스 제조사인 '올스웰' 브랜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월마트 할인점이 아니라 올스웰 웹사이트에서만 판매한다.

인스타그램 리스크

거대 브랜드가 스타트업에 맞서기 위해 필요한 건 자금력이다. 전통적인 광고시장과 판촉 경로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은 돈에서 나온다. 스타트업들에겐 소셜미디어가 최고다. 자본이 부족해 TV나 옥외광고판을 활용하는 건 엄두가 안난다.

하지만 예측하기 어려운 온라인 인플루언서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건 되레 문제가 될 수 있다. 인플루언서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수십만명의 구독자(팔로어)를 보유한 'SNS 유명인'을 말한다.

매트리스 제조사 '캐스퍼'는 이번달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면서 사업설명서를 냈다. 캐스퍼는 설명서에서 '소셜미디어와 인플루언서의 활용'을 리스크 요인으로 꼽아 눈길을 끌었다. '기업의 명성에 중대하고 부정적인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고 서술했다.

3조7000억달러 규모의 미국 소매지출 시장에서 상점과 마트 등 오프라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85%다. P&G CEO 데이비드 테일러는 "네이티브 데오드란트 등 우리가 인수한 스타트업 브랜드를 보면 성장세가 빠르다고 해서 수익까지 빠르게 내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급변하는 제품군의 경우 매출을 높이려면 여전히 마트 진열장 앞에 놓여야 한다는 것. P&G는 월마트와 월그린에서 네이티브 데오드란트를 판매한다. 해리스도 2016년부터 자사 면도기를 할인마트인 '타깃'(Target) 진열대에 올리고 있다.

하지만 최신 브랜드는 눈에 띄기 어려울 수 있다. 스페르두티 대표는 "해리스가 2013년 채택한 목적 기반 전략의 일부분, 즉 기부 등은 점차 진부해지고 있다"며 "게다가 소비자들은 브랜드들이 벌이는 공방에 지쳐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글로벌 거대 브랜드는 점점 힘이 세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컨설팅기업 '인터브랜드'가 매긴 2001년 전 세계 100대 브랜드 가운데 2010년까지 살아남은 곳은 63개였다. 2010년 100대 브랜드 가운데 2019년말까지 살아남은 곳은 76개였다. 일단 빅 브랜드로 자리를 잡게 되면 운용의 여지가 넓어진다. 수많은 위상 실추 문제에도 페이스북은 여전히 인터브랜드 목록 14위를 차지하고 있다. 2007~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JP모간체이스(25위)와 골드만삭스(53위), 모간스탠리(69위) 등의 위상은 여전하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브랜드 기업이라고 해도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 최소한 투자자 입장에선 브랜드 가치가 과거처럼 중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2008~2010년 전 세계 10대 브랜드 가치(가격 요소가 아닌, 현재와 미래 수익 중 브랜드가 기여하는 부분)는 대략 소속 기업 시가총액의 1/3이었다. 하지만 2017년 이후 비중은 1/5로 하락했다. 2017년부터 최근까지 GE 주가는 60% 하락했다. 하지만 브랜드 가치로 보면 40% 하락했다. 2000년 당시 최고의 브랜드였던 코카콜라 상표가치는 기업 시가총액의 절반을 넘었다. 반면 지난해 최고 브랜드였던 애플의 상표가치는 2340억달러로, 시가총액의 1/4 정도였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상황은 브랜드 가치평가 상의 문제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며 "평가 과정이 과학이라기보다 특정 기법에 가깝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브랜드처럼 무형자산의 시대라 해도 주주들은 모호한 브랜드의 가치보다 여전히 규모의 경제나 시장지배력을 우선할 것"이라며 "신흥 브랜드의 지속적인 등장은 거대 브랜드를 계속 각성시키는 효과를 낸다. 거인의 허점을 찔러 그 자리에 올라서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덧붙였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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