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장기획, 산재사고 왜 줄지 않나 - 11
법 제정시 도입된 보고제도, 고용부가 '왜곡' 또 '왜곡'
'요양신청서 갈음제도' 20년 운영 … 갈음제도 폐지되자 또 '적발후 보고 허용'
고용부, 제도정착 노력없어 산재통계 큰 구멍 … 보고재해자 27.5% 요양신청 안해
산업재해 통계는 예방정책의 기초자료다. 기초가 부실하면 건물이 무너지듯, 산재통계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산재예방법과 정책도 부실하게 수립될 수밖에 없다.
산재통계는 크게 보고통계와 보상통계로 나뉜다. 선진국들은 어느 한쪽을 쓰거나 양쪽을 모두 쓰는 등 다양하게 산재통계를 산출하지만 어느 경우든 누락이 없게끔 한다.
우리나라는 보상통계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보상통계(산재보험통계)만을 기준으로 하면 노동자 신분임에도 산재보험통계에 산입되지 않는 많은 재해가 누락된다. 실제 2017년 산재발생 통계를 보면, 근로복지공단에 보상을 받은 재해자수는 8만9848명이고, 산업재해조사표가 접수된 재해자수는 5만4292명이었다. 이중 근로복지공단에 요양신청도 하고 산재보고도 한 수는 3만9376명이다. 5만472명은 요양신청만 하고 산재보고는 하지 않았고, 1만4916명은 그 반대다. 보상통계와 함께 산재보고제도가 정착돼야 하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산재보고제도는 1982년 산업안전보건법 제정때부터 도입됐으나, 고용노동부의 무관심과 왜곡으로 제 역할을 못했다. 산재예방에 헌신한 한 공무원에 의해 가까스로 제도가 정상화됐으나, 그가 떠나자 고용부는 다시 제도를 무력화시켰다.
◆'요양신청서 갈음제도'의 탄생 = 산업재해 발생 보고제도는 1982년 7월 산업안전보건법 제정시 시행규칙으로 도입됐다. 시행규칙 제53조는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한 때에는 산업재해조사표를 관할 노동부지방관서에 제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1993년 1월 '타법 개정'으로 제도가 형해화 됐다. 당시 노동부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을 개정하며 "'산재요양신청서를 제출하면 산업재해조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본다'는 내용을 산안법 시행규칙 단서조항으로 신설한다"고 규정했다. 이른바 '요양신청서 갈음제도'가 단서조항 신설로 도입되며 산재발생 보고제도는 껍데기만 남게 됐다.
노동자의 산재요양신청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니다. 신청을 강제할 수 없어, 산재를 당해도 신청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요양신청에 기반한 보상통계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 산재발생 보고는 사업주 의무이다. 보고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기 때문에 누락이 생기기 어렵다. 요양신청과 발생보고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름에도, 고용부가 전자로 후자를 대체할 수 있게 한 것은 보고제도를 형해화 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다.
◆시행규칙에 명시했다가 위헌 판결 = 이후 산재발생 보고제도는 법률 위임 없이 시행규칙에 명시한 점이 위헌 판결을 받기도 했다.
2006년 7월 사고로 노동자가 사망했는데도 사업주가 노동부지방관서에 산재발생 보고를 하지 않았다가 산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서울동부지방법원은 사건 심리 중 2008년 2월 해당 법조항을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 했다. 산안법 제10조에 '사업주는 노동부령이 정하는 사항을 노동부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한 후, 시행규칙에서 산재발생 보고의무를 규정한 것은 죄형법정주의와 명확성 원칙을 위반해 위헌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위헌제청이 되자 노동부는 2009년 2월 산안법을 개정해 산재발생 보고제도를 법에 명시했다. 하지만 단서조항도 그대로 명시해 보고제도 형해화는 계속됐다. 헌법재판소는 1년뒤인 2010년 2월 뒤늦게 위헌 결정을 했다.
◆형해화 20년만에 '갈음제도' 폐지 = 산재발생 보고제도가 형해화에서 벗어난 것은 산재예방에 열정을 가진 한 공무원에 의해서다. 2013년 6월 고용부 정진우 산재예방정책과장(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주도로 산안법이 개정됐다. 산재발생 보고제도의 단서조항을 삭제해 요양보고서 갈음제도를 폐지했다. 2014년 7월부터 시행된 개정 산안법은 노동자의 산재요양신청과 별개로 사업주가 고용부장관에게 산재발생 보고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당시 박근혜정부 초기 임에도 기업에 큰 부담이 될 수도 있는 내용의 산안법 개정이 이뤄진 것이다. 이로써 1993년 산재발생 보고제도가 형해화된 지 20년 만에 발전적으로 부활했다.
정 교수는 "당시 노동계·경영계와 협의를 통해 산재보상제도와 별개로 산재보고제도를 운영하기로 합의해 법개정을 추진한 것"이라며 "상당히 예민한 사항이라 추진과정에서 제동이 걸릴 수도 있겠다 싶어 논리 개발과 노·사와의 협의에 많은 공을 들였고, 보고제도 부활이라는 의미를 법개정 이유에 명시하지도 않았다"고 회상했다.
◆세계 유례없는 희한한 예외조항 = 산재발생 보고제도 정착을 위해서는 고용부가 기업을 대상으로 중요성을 지도하고 홍보해 이행하지 않는 것은 범죄(형사처벌)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전방위적 지도·홍보를 충분히 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재발생보고를 제대로 하지 않은 기업에 대해서는 실제 처벌을 해야 제도가 조금씩이라도 정착돼 갈 수 있다.
그런데 고용부는 이런 기본적인 노력은 하지 않고 의무를 위반한 기업이 많이 나오자, 기업의 법위반에 면죄부를 주는 편법을 택했다. 2016년 10월 고용부(당시 이기권 장관)는 산안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산재발생시 지방노동관서의 장으로부터 산업재해조사표를 작성해 제출하도록 명령을 받은 후 이를 이행하면 보고를 한 것으로 본다', '보고기한이 지난 후에 자진하여 산업재해조사표를 작성·제출하는 경우에도 보고를 한 것으로 본다'는 제73조 제2조항을 신설했다. 처음부터 의무이행을 하지 않아도 되고 고용부로부터 정식으로 명령을 받고 나서야 보고해도 또는 적발되기 전이면 늦게 제출해도 아무 문제없다고 법령에 '대놓고' 명시한 것이다. 산재발생 보고제도의 정착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보고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희한한 예외조항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이다.
시행규칙 개정으로 기업이 자신의 치부일 수 있는 산재를 자발적으로 보고하지 않고, 나아가 착실하게 법적 의무를 이행하는 기업만 '바보'라는 분위기가 조장됐다.
◆고용부, 산재조사표 정상화에 손놓아 = 산재보상(승인)처리가 된 사업장에 대해 산업재해조사표가 제출되었는지를 비교확인하면 산업재해조사표 제출 누락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런데 고용부 본부에서 지방관서에 이 확인조사를 하도록 하는 지시를 내리지 않다 보니 지방관서에는 확인조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기업체를 대상으로 산업재해조사표를 제출하도록 하는 독려도 하지 않는다. 산업재해조사표 제출에 많은 누락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산업재해조사표 제출을 위한 행정적 노력을 하지 않고도 정상화된다면 이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고용부에 산업재해조사표 제출에 누락이 많은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누락이 얼마나 되고 있는지는 커녕 누락이 되고 있는지 여부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진우 교수는 "고용부는 산재발생 보고제도의 중요성과 운영실태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것 같다"며 "그러다 보니 산업재해조사표 제출제도를 내실화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사실상 손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