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수목적회사'(SPAC) 투자 열풍 지속될까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유명 금융가들 역시 동참하고 있다. 헤지펀드 퍼싱스퀘어의 대표인 빌 애크먼은 지난해 7월 40억달러 규모의 스팩을 출범시켰다. 현재까지 최고액수다. 골드만삭스 사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경제 브레인을 지낸 게리 콘도 스팩 설립에 뛰어들었다. 이밖에 아폴로와 아레스, 베인, KKR, TPG 등 사모펀드 거물들도 속속 참여했다.
17일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서 약 250개의 스팩이 탄생해 약 830억달러를 모았다. 최근엔 더욱 탄력이 붙었다. 지난달엔 주중 매일마다 평균 5개의 스팩이 만들어져 260억달러 넘는 자금을 끌어들였다. 합병 대상이 정해지면 더 많은 자금이 쏟아진다. 스팩 설립 때와 비교해 보통 5배의 자금이 참여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이론상 5000억달러 합병도 불가능한 게 아니다. 이는 미국 전체 상장기업 시가총액의 약 1%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라고 전했다.
스팩의 주기는 보통 2년이다. 페이퍼컴퍼니를 상장시키는 발기인에서 시작된다. 투자자들은 보통 주당 10달러를 낸다. 그리고 신주인수권(워런트)을 받는다. 차후 주식을 더 살 수 있는 권리다. 발기인은 스팩 설립 후 합병대상을 물색한다. 보통 자본을 늘리려거나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을 찾는다. 대상을 찾으면 주주들은 합병을 놓고 주총에서 찬반 투표한다. 새로운 투자자들도 참여한다. 거래가 완료되면 발기인은 합병회사의 주식 일부분을 취한다. 대개 이사회에도 참여한다. 스팩 설립 때 모은 자금은 새로 상장된 기업의 자본금으로 쓰인다.
스팩 지지자들은 전통적인 기업공개(IPO)보다 비용이 저렴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팩 설립과 합병 과정 역시 수수료가 상당하다. 또 발기인이 가져가는 주식이 다른 주주의 이익을 희석시킨다. 그러나 상장 과정이 전통 IPO보다 짧고 덜 불확실한 장점이 있다. 또 스팩과 합병하는 기업은 어느 정도의 자본금을 획득할 수 있을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스팩을 통한 우회상장은 20년 전부터 있었다. 대부분의 시기 위험하다고 간주됐다. 투자은행의 외면을 받은 기업들이 활용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최근의 열풍은 우연처럼 보이는 거래에서 비롯됐다. 2019년 페이스북 부사장 출신 벤처투자자인 차마스 팔리하피티야와 억만장자 사업가 리처드 브랜슨의 만남이다.
브랜슨은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로부터 우주항공 벤처기업인 '버진 갤럭틱'의 자본을 조달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해 말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터키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브랜슨은 계획을 폐기하며 다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팔리하피티야는 2019년 '기존 IPO 시장을 뒤집겠다'며 6억7400만달러 규모의 스팩을 설립했다. 결국 버진 갤럭틱은 팔리하피티야의 스팩과 합병해 6억7400만달러의 자본금을 조달했다. 상장하자마자 22억달러가 됐다. 현재 시가총액은 120억달러에 달한다.
이러한 성공사례가 스팩열풍을 불렀다. 오늘날 스팩 규모는 다양하다. 모금액 5000만달러 이하의 소형에서부터 애크먼의 40억달러 거물까지 있다. 스팩 설립 시점 기준으로 모금액 중앙값은 2억4000만달러다. 일부 스팩은 방대한 규모의 신주인수권을 발급하고 발기인에게 합병 이후 큰몫을 떼어준다. 이와는 정반대의 스팩도 있다. 또 일부는 애초부터 특정 산업부문의 기업을 겨냥한다. 다른 스팩은 모든 부문에 열려 있다. 세간의 주목을 끄는 합병거래는 소규모 트렌드를 만든다. 버진 갤럭틱이 우회상장하자 우주항공 관련 기업들의 합병거래가 여러 건 이어졌다. 전기트럭 제조사인 니콜라가 스팩과 합병했을 때, 전기차업체 다수의 인수합병거래가 뒤따랐다. 지난해 4월 스포츠도박 플랫폼인 '드래프트킹스'의 상장 이후 스포츠 관련 스팩 열풍이 불었다.
스팩이 갑작스런 인기를 끌고 규모와 전망, 구조 등이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스팩이 합리적인가, 어떤 스팩이 단지 열풍에 올라탄 것인가를 구분하는 게 중요해졌다.
거대 투자은행에서 스팩 사업을 책임지고 있는 한 금융가는 이코노미스트지에 "확실한 구분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탁월한 경영진을 갖춘 우량한 스팩이 많다. 이런 스팩은 평범한 기업도 우회상장을 통해 우수한 기업으로 바꿀 수 있다. 하지만 나머지는, 아마 1/3에서 2/3 정도인데, 그들이 일구겠다는 사업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11월 스탠퍼드대 마이클 클라우스터, 에밀리 루언 교수, 뉴욕대 마이클 올로게 교수의 논문도 그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저자들은 2019년 1월부터 2020년 6월까지 합병거래가 타결된 스팩들을 들여다봤다. 25%의 스팩은 발기인이 받는 지분이 합병회사 총주식의 12%를 넘었다. 중앙값은 7.7%였다.
스팩을 통해 우회상장된 기업들의 주가는 3개월 뒤 평균 3% 하락했다. 6개월 뒤엔 12%, 12개월 뒤엔 1/3이 날아갔다. 스팩 합병기업들은 시장 평균 수익률보다 뒤처졌고, 심지어 전통 IPO를 통해 상장된 기업들의 지표보다 나빴다. 하지만 약 절반의 스팩은 '고품질'로 볼 수 있었다. 포춘지 선정 500대기업의 전직 CEO들이 운영하거나 대규모 사모펀드 기업이 설립한 것이다. 이들의 실적은 기존 IPO보다 좋았다. 합병 이후 6개월 동안 시장 평균보다 높은 수익률을 냈다. 물론 12개월 기간에서는 아니었다.
현재의 스팩 열풍이 계속 이어질지도 궁금하다. 지난해 결성된 스팩의 3/4는 아직 합병대상을 못 찾았다.
투자자들은 합병대상을 찾기 전까지 투자금을 원가로 뺄 수 있다. 스팩 IPO 자금은 에스크로 계좌에 묶인다. 실패의 부담, 즉 스팩의 설립과 합병대상 물색의 비용은 고스란히 발기인에게 떨어진다는 의미다. 이를 피하기 위해 많은 발기인들은 질적 평가는 제쳐두고 우회상장을 원하는 기업들을 일단 잡아놓을 수 있다. 이론상 주총 투표와 투자금 상환 메커니즘이 투자자들을 의심스러운 거래에서 보호해주지만 현재까지 투자자들이 돈을 잃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지금은 빈약한 수익이라도 잡아채려는 투자자들의 의지가 강하다. 하지만 스팩이 점차 보편화되면 투자자들은 옥석가리기에 익숙해질 수도 있다. 애크먼의 스팩은 다른 스팩보다 더 큰 가치를 인정받는다. 애크먼 본인은 합병회사 주식 6.7%만 가져갔다. 투자자들은 20% 수익률을 올렸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여전히 니콜라처럼 차세대 테슬라를 찾겠다는 도박을 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견해에서 보면, 스팩 열풍은 증시 전반의 과열을 또 다르게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