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사업20년과 환경정책│① 김대중정부 ~ 이명박정부
'영월댐 백지화' 성과 … 개발시대 토건사업 여전
'새만금' '천성산'에서 4대강사업으로 … 교토의정서 발효 앞두고 '온실가스 감축' 물건너가
장마가 언제 시작된 건지 언제 끝난 건지도 모르게 연일 불볕더위가 이어진다.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숨이 더 막힌다. 전지구적 기후위기라는데 우리는 뭘 하고 있는지 달라지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탈석탄 탈원전 구호가 무색하게 신규 석탄발전소는 계속 건설중이고 원전 발전비중도 높아진다. 4대강 재자연화는 기다리다 지쳐 이제 잊혀진 공약이 됐다. 가리왕산은 3년이 지나서야 복원한다면서 또 2년 동안 곤돌라를 운행하겠다고 한다.
'제주2공항 사업'은 반려됐지만 '가덕도신공항' '흑산도공항' '문산-도라산고속도로' '설악산케이블카' 등 자연 생태계를 훼손하는 수많은 개발사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기후악당' 대한민국은 아직 국제사회에 뚜렷한 온실가스 감축 목표도 내놓지 못했다. 국내 전력의 55%를 소비하는 기업들도 재생가능에너지 100% 전환을 놓고 미적댄다.
김대중정부에서 참여정부, 이명박정부, 박근혜정부, 문재인정부까지 지난 20여년 동안의 개발사업과 환경정책 흐름을 2회에 걸쳐 되짚어본다.
2000년 6월 5일 김대중 대통령이 환경의 날 기념식에서 강원도 영월 동강댐 건설계획 백지화를 발표했다.
시민환경단체들은 "동강댐 백지화는 사실상 정부가 지난 10여년 동안 축적돼온 국민들의 환경의식에 항복한 것을 의미한다"며 "동강댐 백지화는 지난 30여년 동안 계속돼온 개발 중심의 국토정책이 이제 환경친화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동강댐(정확하게는 영월댐) 백지화는 새만금 간척사업과 경인운하 등 대규모 국책사업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시화호의 비극, 새만금으로 이어져 = 김성훈 김대중정부 초대 농림부장관은 취임 후 "더 이상 갯벌을 논으로 바꾸는 대규모 간척사업은 없다"며 새만금보다 더 큰 규모로 추진되었던 '영산강 3단계 간척사업'을 백지화했다.
김 장관은 후일 내일신문 인터뷰에서 "그때 왜 새만금간척사업을 백지화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새만금은 김 대통령이 야당총재 때 노태우 대통령에게 '중간평가'를 안하는 조건으로 제안해서 따낸 호남지역 최초의 국책사업이었다"라며 "백지화하기는 어려운 조건이었다. 그 대신 재검토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으로 백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재검토 과정은 2년 이상 진행됐지만 시민사회가 '수질악화 문제'에 대한 정확안 보고서를 제시하지 못해 결국 결렬됐다.
2002년 세계 3대 환경단체 중 하나인 '지구의벗'은 전세계 언론을 상대로 '리우회의 이후 지속가능한 발전을 해친 101가지 사례'를 발표했다. 이 리스트에서 한국은 '24)갯벌을 파괴하는 세계 최대의 간척사업, 한국 새만금', '25)인공호 시화호의 비극' 등 두 가지 개발사업으로 지구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해친 국가로 기록됐다.
비극은 비극을 낳는다. 흔히 시화호 오염 때문에 새만금 간척사업이 단단히 발목잡힌 것으로 알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개발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시화호는 새만금의 '반면교사'가 아니라 엄청난 이익을 남긴 '모범사례'였다.
시화호가 썩고 담수화 정책이 실패한 후 온갖 비판이 쏟아졌다. 결국 담수호를 포기하고 하루 한번 해수유통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시화호 간척사업은 실패로 끝난 게 아니었다.
시화호 북측이 아파트 상업지구 등 '복합단지'로 개발되면서 매립사업자인 수자원공사는 당초 목적인 농업용지 조성사업에 비해 엄청난 매출을 올렸다.
◆새만금 이후 전북 수산물 '급감' = 2003년 노무현정부 들어 '새만금 삼보일배'가 시작되면서 새만금사업은 커다란 사회적 이슈로 등장했다. 해수유통을 전제로 전북지역을 위해 새만금 일부를 개발하자는 대안 논의도 있었고, 행정소송도 진행됐다.
2003년 7월 1심에서는 본안소송 판결 선고까지 방조제 공사와 관련된 일체의 공사를 중단하라는 결정이 나왔지만 2004년 1월 2심에서는 1심 결정이 취소되고 공사가 다시 재개됐다. 2005년 1월 법원의 조정권고안으로 공사가 중단됐지만, 2006년 3월 대법원 판결을 통해 공사가 최종 추진됐다. 2006년 4월 방조제 마지막 물막이 공사가 진행됐고, 이명박정부 때인 2010년 4월 외곽방조제가 준공됐다.
새만금 바다를 막은 뒤 모든 것이 사라졌다. 갯벌도, 실뱀장어도, 도요새도, 어부도. 죽음의 방조제 위로 자동차만 달린다. 전북지역 수산물 생산량은 2018년 7만7800톤으로 새만금 방조제 착공 시점인 1991년 13만4819톤보다 42.3% 감소했다.
새만금 방조제 축조로 인해 추정되는 전북지역 수산물 생산 손실액은 7조3500만원, 수산업 관련 산업까지 포함하면 총 13조8000억원의 손해가 전북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새만금 소송 대법 판결문은 무척 길지만 판결의 핵심은 "이 바다를 막아 농지로 쓰지 않는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으므로 이 매립사업은 계속되어야 한다"이다.
이 판결 후 90일 만에 새만금 내부 토지 이용방식이 농지 30%로 바뀌었다. 농지로 쓴다는 것은 농지가 70%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석달 만에 뒤집어질 농지/비농지 문제를 대법관들이 정말 몰랐을까? 알았다면 법관의 양심을 저버린 것이고, 몰랐다면 법관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
당시 대법원장은 이용훈, 대법관은 강신욱 이규홍 이강국 손지열 박재윤 고현철 김용담 김영란 양승태 김황식, 주심 대법관은 박시환 김지형이었다. 이들 중 김영란 박시환 대법관만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TBM공법' 도입으로 터널공사 급증 =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때 백지화를 공약했던 '북한산국립공원 사패산터널' '경부고속철도 천성산터널'도 결국 원안대로 공사가 강행됐다.
'사패산터널'은 '북한산국립공원을 우회하는 대안노선이 가능한가'가 핵심 쟁점이었고 '천성산터널'은 '도룡뇽'이 문제가 아니라 '울산(언양)역에서 부산역까지 터널이 아닌 지상노선이 가능하다'는 게 문제제기의 핵심이었다.
사패산터널의 경우 당시 한명숙 환경부장관이 내일신문이 작성한 '국립공원 우회노선' 위성사진 도면을 들고 국무회의에서 문제제기를 했지만 국토부는 북한산국립공원을 4km가 넘는 터널로 관통하는 원안노선을 굽히지 않았다.
2002년 당시 70%의 부산시민이 천성산 관통 고속철도 공사에 반대하고 있었다. 그해 10월과 11월, 대선을 앞둔 노무현 당시 대통령 후보는 '천성산 관통 고속철도 백지화' 공약을 내걸었다가 당선 직후 이를 번복했다. '천성산 지킴이' 지율 스님은 대통령이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고, 문재인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농성장을 찾아 '백지화 상태에서의 노선검토위원회'를 약속했다. 노선재검토위는 청와대와 같은 입장을 가진 일부 인사를 중심으로 구성됐고, 3개월 만에 대안노선이 아닌 '천성산-금정산 관통터널'을 결정했다.
경주에서 부산까지 경부고속도로는 단 하나의 터널도 통과하지 않는다. 물금에서 경부선 철도를 만날 때까지 주변이 고밀도로 개발된 지역은 양산시밖에 없다. 지상노선이 충분히 가능한 조건이었다. 그런데도 경부고속철도는 언양에서 부산역까지 50km를 지하터널로 가는 노선을 선택했다.
당시 건설업계는 유원건설(후 울트라건설)을 필두로 빠르게 터널을 뚫는 'TBM머신'을 속속 도입하고 있었다. 사패산 천성산터널 모두 예정일보다 앞당겨 완공됐다.
◆MB정부 4대강사업과 기후변화 대응 = 낙동강은 원래 '모래의 강'이다. 4대강사업 전까지 낙동강은 풍성한 백사장 사이로 뱀처럼 구불구불 흘렀다.
MB정부 4대강사업의 핵심은 모래 준설과 보 건설이었다. 대규모 준설로 모래톱을 파냈고 8개의 보(댐)를 건설해 강물을 가두었다. 그 영향은 어떻게 나타났을까?
대구 화원나루의 해발고도는 20여미터에 불과하다. 이렇게 작은 해발고도 차이로 낙동강은 부산까지 흘러가야 한다.
지형적인 영향으로 흐름이 느린 구간인데 4대강사업 이후 달성보-합천보-함안보 담수로 낙동강 정체시간이 더 늘어났다. 녹조라떼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4대강사업 전에도 한여름이면 대구 하류의 낙동강에는 녹조가 종종 발생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매년, 상류 상주에서 하류 창원 본포교까지 거의 전 구간,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지속적으로 녹조가 발생한 적은 일찌기 없었다.
이명박정부는 국제사회에 '녹색성장'(Green growth)을 내세웠지만 말 뿐이었다. 녹색성장으로 돌아온 것은 4대강 녹조밖에 없었다. 온 국민의 뜻을 모아야 가능한 에너지 전환은 녹색성장과 사대강의 수렁에 빠져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