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길의 지정학, 그리고 유라시아 3분론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유라시아 내륙의 국가들이 독립했다. 다음해 튀르키예(터키)는 과거 역사·문화적 유대를 바탕으로 그 지역 투르크계 국가들을 모아 투르크권 정상회의를 결성하고 2년마다 소집했다. 이후 '투르크평의회'(Turkic Council)로 격상하고 매년 정상회의를 개최하다가 2021년 11월 '투르크국가기구'(OTS)로 전환했다. OTS 회원국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포함 5개국이고 헝가리가 역사·문화적 인연을 고려해 준회원국으로 초청되었다.
유라시아 내륙에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여전하고 중국도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지만 한동안 사라졌던 투르크연대가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서 재기 움직임을 보이면서 유라시아 지정학 변화의 서막을 암시한다.
중국대륙에는 북방으로부터 중원을 지키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이 있지만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해 만주와 몽골 출신 왕조가 중국역사의 상당기간을 차지했다. 금(金) 원(元) 청(淸) 등이 그 존재를 과시했다.
만리장성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히말라야 이북으로 긴 초원과 고원을 지나 지중해에 이른다. 그곳에는 투르크계 오스만제국이 20세기 초까지 지속하고 있었다. 1세기에는 십자군전쟁을 치른 셀주크투르크가 있었다. 지중해로 가는 길이 이란에 이르기 전에 인도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인도로 간 투르크계 민족은 16세기 무굴제국을 세웠다. 그래서 당시 인도는 투르크어인 힌두스탄으로 불렸다.
유라시아 지역에 새로운 지역균형 꿈틀
어찌 보면 19세기까지 1000년 동안의 세계는 유라시아 북방민족의 천하였다. 문명의 발상지이면서 정치경제 중심인 중국 인도 지중해(서양) 등을 연결하고 변화시키고 지배했다. 연결은 동서교역로 또는 비단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알타이어를 사용하고 말과 활의 문화를 공유했으며 유라시아 지정학의 균형과 변화에 기여했다.
해상 수송로를 따라 서세동점(西勢東漸)이 본격화하자 유라시아 육로는 경쟁력을 잃었고 북방의 역할도 축소되고 무대에서 사라졌다. 영국과 전쟁으로 청나라는 종이호랑이가 됐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를, 영국은 무굴제국을 정복했다. 지중해 연안의 3/4을 지배하고 흑해와 홍해까지 위세를 떨쳤던 오스만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에게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내어주고 20세기에 이르러 소아시아 반도의 초라한 존재가 되었다.
20세기 들어 미국과 양극체제를 형성했던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미국의 경쟁자로 등장하는 가운데 우위를 점하던 미국도 정치·경제적으로 위축되는 모습을 보인다. 변화와 역동성의 유라시아 내륙에서도 새로운 지역균형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이른 감이 있다. 아직 러시아 주도의 군사동맹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가 있고 러시아와 중국이 주도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가 존재를 과시한다.
러시아의 정치·군사적인 영향력과 중국의 경제적인 영향력이 상존하는 유라시아 내륙이기는 하지만 잠시 사라졌던 투르크계 연대의 재기가 변화의 시작이다. 물론 튀르키예가 과거 범투르크주의 추억을 바탕으로 잔존하는 역사·문화적 유대를 강조하지만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 그러나 미국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도 힘이 소진되어가고 있으며 중국도 G2 자리 유지 전망이 불투명하다. 물론 유럽도 활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새로운 균형이 요구된다.
현재는 요원해 보이지만 미국이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지나는 가스관 건설, 카스피해를 횡단하는 수송로 구축, 이란을 통과해 세계와 연결되는 교통로 허용 등으로 유라시아 내륙의 출구 개척을 지원하면서 새로운 균형의 청사진을 제시한다면 유라시아 내륙의 지정학도 '러시아 vs 투르크연대 vs 중국'의 3분구도로 변화가 가능하다.
러시아-투르크연대-중국 3분 구도 가능
튀르키예의 역할이 중요하고 투르크연대와 알타이어 및 말과 활의 문화를 공유하는 여타 국가들과 OTS 협력의 연대를 확대하면 이해타산을 넘어서는 친구를 만들 수 있다.
유라시아 내륙의 몰락은 육로 경쟁력 약화와 동서를 연결하는 길의 소멸에 기인한다. 이러한 길의 부활과 강화는 당연히 북방의 위상 변화로 연결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길은 정보수송로이다. 물리적인 길도 필요하지만 유라시아 내륙에서 정치경제적 의미를 가지고 작동하는 정보화 플랫폼 건설과 운영도 지정학의 변화에 기여할 것이다. 고민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