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일본과 아르헨티나 사이
한때 선진국이었던 아르헨티나에는 '뇨키'(gnocchi)로 불리는 공무원이 있다. 일은 하지 않고 월급을 챙겨가는, 주로 집권한 쪽에서 연줄로 채용된 공직자를 뜻한다.
뇨키는 이탈리아 전통요리 이름이다. 우리나라 수제비와 비슷한데 '목요일은 뇨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즐긴다. 이 요리가 이민자들에 의해 아르헨티나로 건너갔는데 먹는 날이 매월 29일로 바뀌고 이중의 의미가 붙었다. 우리로 치면 옛날 음서채용이나 요즘 '늘공'과 대비되는 '어공'의 뉘앙스와 비슷하다.
2015년 아르헨티나의 새 대통령이 된 마우리시오 마크리는 2만명 이상의 뇨키를 해고했는데 페론당 출신 크리스키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정부가 임명한 사람들이라고 밝혔다.(대런 애쓰모글루 MIT경제학과 교수 등의 저서 '좁은 회랑'을 참고함.)
합리적-법적 권위로서의 관료제와 딴판인 공직 채용
관료조직 안에 이런 사람들이 2만명이나 돌아다닌다면 정부의 역할인 공공서비스가 제대로 제공될 리 없고 국가역량에도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군부독재에 의한 쿠데타가 잦았던 중남미와 아프리카 등에서 지금도 흔히 발견된다. 이들 나라들은 현대적인 관료제를 운용한다지만 막스 베버가 제시한 '합리적-법적 권위'로서의 관료제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뇨키들은 '직무를 수행하는 데 엄격하고 체계적인 규율과 통제'를 받지도 않고, '기술적 자격(실력)을 바탕으로 선발'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1900년대 무렵에는 미국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높은 세계 5대 경제부국이었고, 유럽에서 대거 이민을 왔을 정도로 선진국이었다. 1970년대 이후 경제위기 조짐이 보일 때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개입을 했는데, IMF가 손을 대면 댈 때마다 오히려 경제가 망가지거나, 단기적으로 괜찮아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더 크게 무너졌다. 지난 40여년간 8차례 이상 국가부도를 경험했고, 2020년 들어서 9번째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다. 이번에는 페론주의를 신봉하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2019년 12월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사실상 디폴트(virtual default) 상황에 빠져 있다"고 국가부도 선언을 했다. 2만명의 뇨키를 해고한 마크리 전 대통령이 "시한폭탄을 넘겨준 것"이라는 강한 비판과 함께.
국민소득 개념으로 GDP 통계를 완성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발전론의 석학 사이먼 쿠즈네츠 교수는 "세계에는 네가지 유형의 국가가 있다. 선진국과 후진국, 그리고 일본과 아르헨티나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패전국에서 한세기도 안돼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가 일본이라면 아르헨티나는 선진국에서 미끄러진 유일한 나라로 정반대의 경우다.
우리나라 관료조직을 아르헨티나와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으로 과거 권위주의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화에 성공한 이래 우리나라도 직선제 대통령(또는 대통령실)이 직간접적으로 인사권을 행사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일자리가 점점 늘어나면서 어림잡아 1만8000개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정부부처, 이를테면 국무총리, 장·차관급이 140개 이상이고, 공공기관의 장·임원·감사 등을 직접 임명하는 공공기관도 200개가 넘는다. 장관이 임명하지만 대통령실의 영향이 미치는 정부 부처 국·실장급이 350개 이상이고, 부처 산하기관 임원 같은 대통령실의 의중이 반영되는 곳 등으로 1만8000개 정도를 추정해볼 수 있다.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공부분 공기업 산하단체 등 일자리와 지방자치단체의 자리까지 포함하면 그 범위는 훨씬 넓다.
정부, 허리띠 졸라매고 국민과 함께 복합위기 돌파할 진정성 보일 때
진보와 보수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는 과정에서 공직이 점차 정치화, 엽관제화, 지대추구의 통로가 되고 있다. 새정부 들어 또다시 '공공부분 개혁'이라는 너무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리지만 과연 이번엔 다를까. 자칫하면 우리나라는 '잃어버린 30년' 빠진 일본과 선진국에서 미끄러진 아르헨티나 사이쯤의 어디엔가 갇힐 수도 있다.
전쟁, 인플레이션, 식량부족, 에너지 수급 불안, 스태그플레이션 등이 복합적으로 겹친 2차대전 후 최대 세계 경제위기라는 우려가 나오는 때다. 공공부분 개혁이 뇨키 식 교체놀음이 되어서는 안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처럼 허리띠를 다시 졸라매고 이 위기를 국민과 함께 돌파해나가기 위한 정부의 진정성을 보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