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엔 글로벌 기업들의 공장이 즐비하다. 르노-닛산과 현대차는 대규모 자동차공장을 돌리고 있다. 델은 컴퓨터를 만들고, 삼성전자는 TV와 세탁기 냉장고를 만든다. 애플 공급업체도 많다. 대만 폭스콘과 페가트론, 핀란드 위탁제조기업 살콤 등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인도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메이크 인 인도' 캠페인을 따라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이제 인도는 제조업 가치체인을 한단계 올리려 한다. 반도체 제조 역량을 구축하기 위해 100억달러 인센티브를 책정했다. 반도체 제조 부문에 진입하려는 인도의 야심은 무역과 지정학적 갈등이 고조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서구 국가들은 중국에 구축한 공급망을 서서히 떼어내려 한다. 중국은 반도체산업 선도국이 되기 위해 막대한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중국의 철저한 봉쇄정책으로 글로벌 반도체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제조 대체지역을 찾고 있다. 인도는 중국에 대항하는 민주적 대안을 가진 기술허브로 홍보하며 기업 유치전을 펴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3일 "인도가 반도체 제조산업 육성에 성공한다면 대규모 수익을 안겨다주는 효자산업이 될 수 있다"며 "반도체 수요는 급속히 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은 물론 인도가 이미 제조중인 컴퓨터와 전자기기, 자동차 등 산업의 반도체 식욕도 왕성하다"고 전했다.

인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인 라지브 찬드라세카르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인도는 매력적이다. 우리는 미국 등 전통 시장들 밖에서는 가장 큰 반도체 소비국가 중 하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제조기업들은 인도정부의 100억달러 보조금에 속속 화답하고 있다. 싱가포르 IGSS벤처스는 타밀나두 주정부와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이 기업 창업자이자 CEO인 라즈 쿠마르는 "3년 내 웨이퍼 공장을 짓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타워세미컨덕터와 아부다비 넥스트오빗벤처스가 합작한 ISMC도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뱅갈루루가 속한 카르나타카 주정부와 30억달러 규모 반도체 제조공장을 구축하기 위한 협약서에 서명했다.

대만 폭스콘은 인도 원자재기업 베단타그룹과 손잡고 반도체 제조공장을 지을 계획이다. 현재 구자라트주와 마하라슈트라주 등에서 공장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폭스콘 회장 류양웨이는 지난달 투자자 모임에서 "인도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특정제품에 대한 언급은 삼갔지만 "인도의 전반적인 사업 환경이 개선됐다"며 "인도가 향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정학적 강점을 갖고 있지만 인도의 향후 여정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인도가 '중국의 대안'이라며 해외 마케팅을 벌이지만, 유럽과 영국 미국 많은 국가들도 자국 내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풀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제조 용량은 수직상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제조 위해 개선해야 할 점 많아

반도체 제조와 공급망의 복잡성 때문에 중국과 대만 한국 등 동아시아 소수 국가의 제조사들이 글로벌 공급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고 있다. 미 의회는 지난 7월 '반도체 칩과 과학법'을 통과시켰다. 반도체 제조와 연구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520억달러 보조금을 제공하는 내용이다. 유럽연합(EU) 역시 430억유로 규모의 반도체법안을 갖고 있다.

인도가 반도체 제조엔 발을 들이지 못했지만 반도체 설계 부문엔 강점을 갖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 통계학자이자 연구자인 마힌탄 조셉 마리아싱함은 "인도는 강력한 소프트웨어 기반을 갖고 있다"며 "반도체 제조는 관련 인프라 부족 등의 이유로 다른 나라에 뒤처졌지만 물리적 인프라가 크게 중요치 않은 소프트웨어 시장에는 쉽게 진입했다"고 말했다.

반도체 제조는 그 어떤 분야보다 정확한 공장 조건을 요구한다. 인도의 많은 부분이 바뀌어야 한다. 인도는 공학인재와 관련 전세계 가장 중요한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하지만 최고수준을 요하는 기술제조 부문은 중국이나 베트남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국적기업들은 오랫동안 인도에서 고전했다. 불규칙한 운송과 전력·수자원 등 공공시설 때문이다. 실리콘칩을 만들려면 극도의 정밀함을 갖춰야 한다. 전력이나 물 공급이 단 몇초만 중단돼도 수백억달러 손실이 생길 수 있다. 정전은 인도 대부분 지역에서 일상적이다.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자체 발전 시스템을 갖추는 편을 택한다.

저임금이라는 인도의 전통적인 경쟁력도 반도체 제조라는 자본집중사업에선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편 100억달러 보조금이 제대로 쓰일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인도는 독립 후 수입대체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장려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지만 엄청난 돈을 낭비하고 인도 경제 자체를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인도가 새로운 영역에 진입하기보다 고유의 장점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한다. 전세계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활약할 숙련된 IT 인재들을 육성하는 것이다. 반도체 제조보다 국민세금을 효율적으로 쓰는 길이기도 하다.

인도중앙은행 전 총재로 현재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 금융학 교수인 라구람 라잔은 "소프트웨어와 설계 공학자를 키우면서 미국 퀄컴처럼 주요 반도체 설계 기업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인도로선 대만 TSMC처럼 선도적인 반도체 제조기업을 모방하는 것보다 퀄컴이 되는 길이 훨씬 쉽고 저렴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제조로 가치사슬 상승 꾀해

반면 인도 제조기업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하고 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초기 비용을 대신 지불해주는 데다 전국가적으로 '할 수 있다'는 국수주의적 분위기를 유도하고 있다.

원자재기업 베단타그룹의 회장 아닐 아가왈은 지난달 인도 독립 75주년을 기념하는 글을 SNS에 올리면서 "지금은 인도의 순간"이라며 "향후 25년 동안 우리는 실리콘밸리를 능가하는 전세계 선도기술 허브를 구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뭄바이 고철수집상에서 시작해 굴지의 기업을 이룬 사람이다. 금속거래와 광산업으로 글로벌 대기업을 구축했다. 인도가 기업 가치사슬 측면에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베단타는 현재 인도에서 처음 반도체를 제조하는 기업이 되려 한다. 세계 최대 위탁생산기업인 대만 폭스콘과 손잡았다. 그는 "대부분의 기술적 작업은 폭스콘에서 맡는다"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패널 모두를 생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베단타는 일본과 한국 대만에서 디스플레이 패널을 생산중이다.

폭스콘 홍보담당자인 지미 황은 "우리의 글로벌 족적을 보라. 폭스콘은 아무도 가려고 생각지 않는 곳에 간다"며 "오늘날 아무도 인도가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폭스콘은 인도정부와 함께 반도체 산업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JP모간 인도법인은 여러 기업들에게 반도체 벤처사업과 관련한 자금조달 등을 자문하고 있다. 인도법인 CEO 마드하브 칼리안은 "그들은 인도정부가 반도체 제조 역량 구축에 성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는 지난해 12월 '인도반도체미션'이라는 명칭으로 반도체 제조국이 되겠다는 열망을 공개했다. 찬드라세카르 장관은 "인도는 전자 생태계를 넓히는 전략을 갖고 있다. 우리는 레드카펫을 깔아 수많은 기업들을 유치하고 있다. 중국에서 다른 지역으로 제조시설을 옮기려는 기업들이 주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모디가 2014년 총리가 됐을 당시 인도 전자산업은 거의 빈사 상태였다. 수년 동안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산업이 황폐화됐다"며 "현재 인도의 야심은 전자산업 매출을 3배 이상 늘리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750억달러였던 매출을 2026년 3000억달러 이상으로 높이겠다는 구상이다.

중앙정부 보조금 말고도 인도 남부와 서부의 기업친화적인 주정부들은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서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세제혜택과 기타 인센티브는 물론이고 토지와 수자원, 전력, 기타 생산투입 요소도 제공하고 있다.

스탠더드차터드와 리먼브러더스에서 몸담았던 타밀나두주 재정장관 피 티아가 라잔은 "공급이 가장 달리는 토지는 물론 수많은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우리는 매우 능동적인 기업유치 정책을 갖고 있다"며 "타밀나두주가 타타와 폭스콘 등이 사업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지원했는지를 살펴보라. 우리는 모든 퍼즐을 짜맞추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는 우려, 투자자는 환영

일부 전문가들은 글로벌 업계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상황에서 반도체 제조 시설 구축을 과도하게 강조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터프츠대 플레처 국제관계대학원 교수이자 '반도체 전쟁 : 전세계 가장 중요한 기술에 대한 싸움' 저자인 크리스토퍼 밀러는 "반도체 가치사슬엔 수많은 단계들이 있다. 칩제조는 그중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며 "반도체 대국들이 모두 칩을 제조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인도가 생산하게 될 반도체는 자동차나 전자장비에 쓰이는 낮은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첸나이와 같은 산업도시에서 수요가 높은 반도체다. 밀러 교수는 "인도는 효율성 높은 대만의 생산기업들이나 막대한 보조금 수혜를 받는 중국 기업들과 경쟁하는 데 고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 등의 기성 기업들과 낮은 수준의 반도체 제조를 놓고 경쟁하는 대신, 반도체 조립과 패키징 시설에 예산을 투입하는 게 더 낫다"며 "인도정부가 이런 부문에 보조금을 지정한다면, 100억달러라는 돈의 효과는 오래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라잔 교수는 "인도는 반도체 제조공장보다 인적자본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역량을 키우는 게, 반도체를 설계할 수 있는 1만명의 인재를 키우는 게 보다 합리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00억달러를 반도체 제조 시설에 투입하는 대신, 1억달러씩 100개의 신규대학을 만들어 공학을 비롯한 반도체 관련 분야의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반도체 분야의 초기 투자자들은 인도정부의 관점에 호응한다. 인도 전자산업의 수요가 점차 커지면서 반도체 가치사슬의 모든 단계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것.

반도체 대기업 글로벌파운드리에 몸담았던 싱가포르 IGSS벤처스의 쿠마르 회장은 "싱가포르는 인구 600만명이 채 안되고 반도체 수요가 극히 미미한데도 여러 곳의 웨이퍼공장을 유치했다"며 "인도의 잠재력을 상상해보라. 최고의 경제국가가 될 인도는 최소한의 반도체 제조능력을 자체적으로 보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