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아프가니스탄에서 유라시아의 미래를 발견하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지 1년이 넘었다. 20년 넘게 주둔했으나 아프간은 전쟁 이전으로 회귀한 것 같다. 그렇지만 그동안 다양한 시도는 여러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프간은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동서교역로(비단길)의 교차로에 위치하며 인도로 가는 길의 시작이다. 그래서 한때 배후지역이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아프간전쟁은 미국 의도대로 종결되지 않았지만 유라시아 내륙의 변화 가능성을 제시했다. 20년간 정세불안을 거쳐 탈레반이 다시 집권했지만 예전과 달라 보인다. 아프간에서 시작하는 유라시아의 발전적 변화 잠재력을 발견한다.
어찌 보면 풍요와 번영은 길을 따라 이루어졌다. 경제학자 리카르도는 각자가 비교우위를 가진 재화를 생산해 서로 교역함으로써 전체 생산을 늘리고 그로 인해 모두가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했다. 그래서 번영하고 발전하는 지역이나 국가는 길과 인접하거나 길과 연결되어 있다. 로마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도로를 건설했고 중국은 양자강과 황하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고 몽골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동서양을 연결하는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길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주장이 나올만하다.
동서교역로, 유라시아 번영의 기본 인프라
유라시아 내륙에는 동서양의 중심지를 연결하는 길이 있었다. 중국 인도 그리고 지중해 지역에서 문명이 태동했고 정치·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넘쳐나는 재화를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졌고 교역은 동서교역로를 통해 가능했다. 그 길은 아프간 인근에서 갈라졌다. 교차로 배후거점인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번성했다. 고구려 사신을 받아들인 아프로시압 궁전도 이곳에 있다.
해양의 시대에 이르러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해로가 우위를 점했고 러시아와 영국간 '그레이트 게임'과 뒤이은 냉전 지속으로 유라시아 내륙은 몰락했고 길은 단절됐다. 그런데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코카서스 및 중앙아시아를 독립시키고 동서교역로의 재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던 중 2001년 9.11 테러 사건으로 시작된 아프간전쟁은 미국에게 병참선을 개척하도록 하면서 과거의 유라시아 수송로 부활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전쟁초기 군수물자를 아프간으로 수송하는 길이 없었다. 인도양에서 파키스탄을 지나 아프간으로 이어지는 남방수송로가 한동안 이용되었지만 탈레반의 공세로 2008년부터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대안으로 발트해와 흑해에서 출발해 우즈벡에서 집결한 후 아프간으로 진입하는 북방수송로(NDN, Northern Distribution Network)가 개척됐다.
NDN은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해 비살상 군수품의 75% 수송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국은 주로 전쟁물자 수송에 관심을 가졌고 2021년 8월 철수 이후 유라시아 수송로 개척은 동력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NDN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던 미국은 그 길의 전략적 의미를 발견했다. 2011년 9월 당시 힐러리 미 국무장관은 '새로운 비단길'(New Silk Road)이라고 부르면서 그 의미를 강조했다. 2012년 아프간정부는 아프간에서 카스피해를 지나 튀르키예로 연결되는 라피즈 라줄리 수송로 (Lapis Lazuli Corridor) 건설을 제안해 논의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에 투르크메니스탄 가스를 아프간을 경유해 인도로 수송하는 TAPI 가스관 건설 사업의 협의가 본격화됐다. 당시 아프간전쟁의 병참 지원이 주된 관심사였지만 한동안 잠자고 있었던 유라시아 내륙의 수송로 부활 시도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아프간전쟁, 동서교역로 재개 가능성 제시
리카르도의 비교우위 실천을 통해 경제적 번영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했다. 현재 유라시아 내륙에는 러시아와 중국으로 향하는 수송로 이외에 세계시장으로 연결되는 길이 없다.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내륙 지역의 미래를 위해서는 출구 수송로 구축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국은 철수했지만 동서교역로의 의미를 이해하는 유라시아 전략은 있어야 한다. 정세는 안정되어가고 탈레반도 국가재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전쟁 과정에서 구상하고 추진한 경험과 논의는 유라시아 미래를 건설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산이다. 인도까지 연결되는 TAPI 가스관, 그리고 라피즈 라줄리 수송로 건설을 위한 여건이 나아지고 있다. 때를 만나고 힘을 모으면 아프간에서 시작하는 유라시아 미래의 도모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