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보조금과 지역의 작은 기득권
새해 예산을 확정해야 하는 연말이 다가오자 중앙과 지방의 정권교체를 실감하는 사건이 각지에서 들려온다. 중앙정부 예산은 편성 우선 순위를 둘러싸고 여소야대 국회에서 연일 격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당이 주도권을 장악한 곳이 많은 지자체의 상황도 만만하지 않다. 특히 지자체가 배분하는 시민사회단체 보조금은 지방권력의 향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현실을 간과할 수 없다. 서울 마포구의 작은 도서관 지원 예산 배정을 둘러싼 갈등이나 안산의 세월호 피해자 지원금을 둘러싼 시비는 예고편에 불과하다. 새해가 밝아 개별 단체에 지원할 보조금을 확정해야 하는 날이 되면 희한한 사건이 각지에서 벌어질 것이다.
여당은 지난 정권 시절 더불어민주당과 시민단체가 보조금을 매개로 유착관계를 형성해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국민의힘과 보수 시민단체 관계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구매력 기준 소득수준이 일본을 앞서는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언제까지 시민사회단체가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금에 목을 매고 있어야 할 것인가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신규단체 진입이 원천적으로 어려운 구조
필자는 기초자치단체 수준에서 공익위원 자격으로 시민사회단체 보조금 심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를 공유하면 조금이라도 세금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시민사회단체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조직은 사실상 한정되어 있다. 각종 전우회를 비롯한 보훈단체가 신청한 예산은 무조건 지급하는 것이 관행이고 약간 감액하는 조정만 가능하다. 고성과 함께 회의자료를 집어던지는 군복 입은 어르신을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 지자체장들도 보훈단체 지원금은 손대지 말라고 사전에 당부한다. 그래도 이런 경우는 젊음을 바쳐 국가를 위해 고생하신 분들이니 안타까운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간다.
법률적 근거가 있는 새마을운동 바르게살기운동 자유총연맹에 나가는 예산도 건드릴 수 없다. 초등학교 앞 통학로 교통정리를 하는 어머니회, 청소년 선도 단체, 범죄예방협회와 같은 각종 행정 지원 단체가 신청한 지원금도 마찬가지다. 지자체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를 뒷받침하는 사진가협회 문인협회 서도협회 등의 관변 문화단체도 당연히 지원해야 한다.
관행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단체를 배려하고 나면 지역 특성을 반영한 새로운 시민운동이나 봉사활동을 구상하는 단체에게 배정할 보조금은 얼마 남지 않는다. 즉, 신규단체의 진입이 원천적으로 어려운 구조가 지역에 형성되어 있다.
보조금 신청서류에 나타난 수혜단체의 활동 내용을 보면 비슷한 사례가 많다. 우선 지역에 문제아가 많다는 선입견이 있다. '청소년 선도 활동'은 대부분 신청단체의 공통 항목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겠다는 내용은 없고 기껏해야 전적지 견학 정도다. 여러 단체가 '독거노인 급식' 활동을 명분으로 보조금을 받는다. 외로운 어르신을 동네 이웃들이 돕겠다는 취지는 고맙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야말로 사회복지서비스를 개선해 누락되는 어르신이 없도록 지자체가 챙겨야 할 일이다.
범죄예방이나 교통질서 계도 활동도 여러 단체의 단골 메뉴이다. 활동에 필요한 경광등과 형광조끼 구입비를 해마다 신청한다. 한번은 비교적 젊은 심사위원들이 경찰이 있는데 어째서 민간단체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나 앞으로 지자체 행사에 아무도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최후통첩을 하는 기초의원 출신 심사위원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대형 단체에 나가는 보조금을 약간 감액하고, 그 돈으로 노숙자 쉼터 지원비를 늘리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민주사회 구현하려면 보조금 정치 쇄신 필요
현재 보수와 진보, 여야를 막론하고 작은 기득권을 가진 지역단체와 갈등을 일으키며 보조금 지급 관행을 바꿀 의지를 가진 정치세력은 희귀하다. 조금 있으면 모든 선출직 공직자들이 앞치마 두르고 김장하는 사진을 찍으며 불우이웃을 돕는다고 생색을 낼 것이다.
이러한 광경은 대통령이 어느 당에서 나오든, 의회 다수당이 어디든 달라지지 않는다. 진정한 민주사회를 구현하려면 지역의 보조금 정치를 반드시 쇄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