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플라스틱 새로운 물결
생산자책임재활용제 등 순환경제제도 보완 기회로
25일부터 부산서 국제플라스틱 협약 마지막 회의
탄소중립 달성 위해 배출권거래제 유상할당 확대도
25일 오전 부산 벡스코 인근에 ‘전세계 시민이 지켜보고 있다’는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눈 모양을 형상화한 이 깃발은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플라스틱 생산 규제를 주장하며 스위스 예술가 댄 아처(Dan Acher)와 협업한 작품이다. 전세계 시민 6472명이 제공한 초상 사진을 활용해 가로 30m, 세로 24m 크기의 거대한 눈 형상을 만들었다.
25일 그레이엄 포브스 그린피스 국제 플라스틱 행동 지도자는 “각국 정부 대표단은 특정 산업 이익이 아니라 플라스틱 오염 문제 해결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며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목표를 담은 강력한 협약”이라고 강조했다.
탈플라스틱을 둘러싼 국제 사회의 관심이 대한민국 부산에 집중된다.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플라스틱 오염 대응 국제협약 성안을 위한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5)’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면서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질 전망이다. 이번 회의가 우리나라에서 열리지만, 회의를 주도하는 의장국은 아니다. 의장국은 에콰도르다. 에콰도르는 강력한 플라스틱 규제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21일 외교부 관계자는 “골격협약(Frame-work Convention) 혹은 특정협약(Specific Convention)으로 결정될지는 실제 논의가 진행돼야 알 수 있다”며 “170여개 국가들이 모두 합의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우선 플라스틱 국제협약 성안(성안 뒤 서명 비준 등의 과정을 거쳐 협약 발효)을 이뤄낸 뒤 추가 논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게 현실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골격협약은 유엔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등과 같이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만 포괄적으로 규정한 뒤 세부적인 사항은 별도 합의 과정을 통해 진행하는 경우다. 1994년 유엔기후변화협약이 발효된 뒤 2015년 파리협정을 채택되는 식이다. 파리협정은 산업화(1850~1900년) 이전 대비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2℃보다 상당히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온도 상승을 1.5℃ 이하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특정협약은 바젤협약처럼 협약문서에 핵심의무와 관련 조치 등을 함께 규정하는 경우다. 바젤협약은 유해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 및 처리에 관한 국제협약이다.
◆1차 폴리머 규제 시 범용 플라스틱 타격이 더 커 = 이번 회의에서는 △1차 플라스틱 폴리머(단량체가 일정하고 반복적인 단위로 사슬처럼 연계된 큰 분자) △폐기물 관리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등이 논의된다. 1차 플라스틱 폴리머는 석유 등 화석연료에서 원료를 추출해 만드는 새 플라스틱(신재)이다. 1차 플라스틱 폴리머 생산 규제는 산유국이나 석유화학산업 비중이 큰 국가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다자환경협약인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처럼 이번 플라스틱 국제협약 대응을 위해 이해관계별로 다양한 협상그룹들이 구성됐다. △플라스틱 오염 대응 우호국 연합(HAC: High Ambition Coalition)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인도 등이 참여하며 재활용에 초점을 맞춘 ‘국제 플라스틱 지속가능성 연합(Global Coalition for Plastics Sustainability)’ △미국 등이 속한 관망그룹 등이다.
HAC 그룹은 1차 플라스틱 폴리머의 생산 및 소비를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감축하는 안을 지지한다. 특수 플라스틱 생산에 중점을 두는 유럽연합(EU)과 달리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국가는 폴리스티렌(PS) 폴리염화비닐(PVC) 폴리프로필렌(PP)과 같은 범용 플라스틱을 주로 생산한다.
특수플라스틱은 고기능성과 특수한 물성을 가진 제품이다. 폴리카보네이트(PC) 폴리아세탈(POM) 폴리아미드(PA) 폴리페닐렌설파이드(PPS) 등이 이에 속한다. 1차 폴리머 규제 적용 시 특수플라스틱의 경우 범용플라스틱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EPR은 제품 생산자나 포장재를 이용한 제품의 생산자에게 그 제품이나 포장재의 폐기물에 대해 일정량의 재활용의무를 부여해 재활용하게 하는 제도다. 만약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재활용에 들어가는 비용 이상의 재활용 부과금을 생산자에게 부과한다.
EPR을 둘러싼 170여개국의 입장은 첨예하게 나뉜다. 규제강화를 주장하는 측은 국가별로 EPR 도입을 의무화하자며 목소리를 높인다. 국제 EPR 도입 주장도 나온다. 반면 국가별로 자발적으로 EPR을 도입하자는 입장도 강하다. 아예 해당 조항을 삭제하자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선형경제에서 순환경제로 전환시 관련 제도 점검 = 이번 플라스틱 협약 논의를 계기로 국내 관련 정책을 보다 정교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한국법제연구원의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글로벌 규범 현황 및 대응방안 연구’ 보고서에서는 “선형경제에서 EPR을 운영하는 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순환경제 체제에서 현행대로 진행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재활용원료의무화 비율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는데, 현 수준에서 해당 비율이 높아지면 품질 좋은 원료를 찾지 못해 역으로 원료를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순환경제는 자원 절약과 재활용을 통해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친환경 경제 체제다. ‘자원채취-대량생산-폐기’ 중심인 기존 선형경제 대안으로 확대 중이다.
21일 홍수열 자원순환경제연구소장은 “탈플라스틱과 함께 재사용과 재활용 고도화가 함께 논의될 수밖에 없다”며 “EPR로 달성하기 어려운 부분은 보증금제도나 다른 방안을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판트(Pfand)’ 제도를 운영 중이다. 사용한 플라스틱이나 캔 등을 반환하면 일정 금액의 보증금을 돌려준다. 보증금이라는 경제적 유인책을 통해 생산자 소비자 유통업체가 모두 참여하는 자원순환 체계를 구축하는 게 목표다. 우리나라도 빈용기 보증금제를 시행 중이다.
게다가 플라스틱은 온실가스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네덜란드 환경단체인 ‘플라스틱 수프 재단(Plastic Soup Foundation)’에 따르면, 1ℓ짜리 플라스틱병 하나를 생산하는데 화석연료 1/4ℓ가 소모된다. 또한 전세계 석유 생산량의 8~10%가 플라스틱을 만드는 데 쓰인다고 추정된다.
◆소각장 등 배출권거래제 점검 필요 =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글로벌 규범 현황 및 대응방안 연구’ 보고서에서는 배출권거래제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소각시설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상당량은 폐기물이 원인이다. 하지만 배출권이 무상으로 할당됨에 따라 폐기물을 원천적으로 줄이려는 노력을 독려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배출권거래제는 온실가스 배출자가 배출량에 비례해 가격을 지불하도록 하는 제도다. 정부가 온실가스 배출권을 발행하고 기업들은 온실가스 배출량만큼 배출권을 시장에서 사서 정부에 제출한다. 기업(할당 업체)마다 감축 목표량이 있고 목표량만큼 감축하지 못하면 배출권을 구매해야 한다. 만약 이를 지키지 못하면 과징금을 문다. 반대로 목표량을 초과하면 그만큼 배출권을 내다 팔 수 있다.
국회예산정책처의 ‘기후대응기금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실적을 기반으로 한 자료가 있는 2023년 배출권 실질 유상할당 비율은 3.8%에 불과하다. 제3차 배출권거래제 기간(2021~2025년)의 유상할당 비율은 10.0%다. 하지만 배출량 전체를 무상으로 할당받는 업체들도 있으므로 실질 유상할당 비율은 10.0%보다 낮은 3.8% 수준에 불과하다는 분석이다.
21일 환경부 관계자는 “소각업체의 경우 민간과 지방자치단체로 나뉘는 데, 지자체의 경우 무상할당 대상”이라며 “무역집약도와 생산발생비용도 등의 자료를 토대로 무상할당 업체를 선정하는데, 제4차 배출권거래제 기간에는 비용발생도 대신 탄소집약도를 반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체 할당 계획 변경 시 결정되는 사항으로 소각업체만을 대상으로 유상할당 변경 등을 얘기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3차 계획기간은 2025년에 끝난다. 4차 계획기간은 2026년 1월부터 시작한다. 이에 정부는 2024년 12월까지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와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제4차 배출권거래제기본계획을 확정해야 한다. 또한 2025년 6월 말까지 제4차 국가 배출권 할당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해양쓰레기 전단계인 하천이나 하천변 관리부터 =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의 ‘유엔 플라스틱 협약의 주요 쟁점 분석 및 대응방향 연구’ 보고서에서는 이번 플라스틱 협약 논의를 미흡한 플라스틱 오염 대응 정책 개선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플라스틱 오염 관리를 해양으로 유입되기 전인 하천이나 하천변 등 육상 환경에서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폭우 등 재해기에 밀려오는 육상폐기물 저감을 위해 선제적인 대응 매뉴얼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21일 또 다른 환경부 관계자는 “중국산이 워낙 저렴해서 들어오는 물량들이 있긴 한데, 협약 성안을 이룬 뒤 그 안에서 논의를 진행해야 할 문제”라며 “자국에서 플라스틱 생산을 원천적으로 줄이는 게 우선이고, 그 안에서 재활용을 해야 한다는 원칙들을 만들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육상에서 내려오는 쓰레기 문제는 해양수산부 등과 실무적으로 계속 협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김아영 기자 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