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와 함께 하는 과학산책
유전자 회로 정보를 조립부품처럼 활용하는 시대
생물은 매순간 다양한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이중 일부 화합물은 약품 화장품 식품 등 우리 삶과 문화를 지탱하는 제품의 원료가 되기도 한다. 버드나무 껍질에서 유래해 지금은 해열제나 진통제 등으로 쓰이는 살리실산이나, 홉이라는 식물에서 유래해 맥주에 독특한 향과 쌉쌀한 맛을 더해주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런 약품과 식품에 들어갈 재료를 만들기 위해 생물을 통째로 키우는 일은 제법 낭비가 크다는 점이다. 살리실산을 얻으려고 버드나무를 키운들 나머지 부분은 약품에 쓰기 어렵다. 홉도 그 꽃을 향신료로 맥주에 첨가할 뿐 나머지 부분을 넣진 않는다. 그렇지만 쓸 수 있는 부분을 만들어내려면 쓸모없는 부분을 키우는 데도 힘을 쏟아야 한다. 그 생물이 살아가는 데는 우리에게 쓸모없는 부분들이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뿌리가 없이는 나무껍질도 꽃도 생겨날 수 없지 않던가.
그러니 이런 생물로 하여금 인류에게 필요한 화합물을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세포라는 공장 그 자체를 개조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생물을 활용하되 화합물만 효과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생물 유전자를 개조하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은 오래된 방법론이지만,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유전자 한두개를 바꿔내는 수준이어서 원하는 화합물이 생산되도록 유전자를 조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합성생물학이 강력한 방법론 제공
하지만 이제는 수많은 유전자가 포함된 유전자 회로를 조작할 수 있고, 이런 유전자 회로를 조립식으로 활용해 다양한 화합물 생산을 효율화하는 것도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니 생물을 통째로 키우는 대신 쓸모없는 것들이 거의 없는 단순한 생물에게 필요한 유전자 회로를 추가로 장착시키고 원하는 화합물 제작을 맡길 수 있다. 합성생물학이라 불리는 이 분야는 생물 유래 화합물을 편리하게 생산해낼 수 있는 강력한 방법론을 제공해준다.
연구자들은 합성생물학을 통해 세포라는 공장에 새로운 설비를 도입하고 있다. 세포라는 공장은 DNA에 담긴 유전자 정보를 바탕으로 운영된다. 유전자에 담긴 정보는 단백질을 만들어내고, 수십 종류의 서로 다른 단백질이 하나의 설비를 구성해 화합물을 합성한다. 이처럼 특정한 화합물을 만들어내는 데 쓰이는 유전자 조합을 유전자 회로라고 부른다. 동식물과 미생물은 저마다 다양한 화합물을 생산해낼 수 있고, 그렇다 보니 독특한 유전자 회로를 다양하게 지니고 있다. 지난 수십억년 동안 생물이 다채롭게 진화하는 과정 속에서 온갖 유전자 회로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화합물을 합성할 수 있는 유전자 회로라는 복잡한 설비들은 인류가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 된 지 오래다. 이 유전자 회로라는 화합물 생산 관련 설비 정보를 한 생물의 DNA에서 읽어낸 뒤, 단순하기 그지없는 세포 공장에 도입해 유용한 화합물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합성하는 데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전자 회로를 한 생물에서 다른 생물로 옮기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일단 생물에 어떤 유전자들이 담겨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유용한 화합물을 만들어낼 유전자 회로를 골라내는 과정이다. 그 뒤에는 이렇게 골라낸 유전자 회로 정보를 담아낸 새로운 DNA를 합성한다. DNA 정보를 읽어내는 기술과 합성하는 기술은 물론이거니와, DNA 정보로부터 유전자의 기능을 예측하는 기법 또한 빠르게 발전한 덕분에 가능해진 일들이다.
이렇게 합성해낸 유전자 또는 유전자 회로 정보는 마치 조립부품처럼 활용될 수 있다. 이런 부품을 조합하고 DNA로 잘 포장한 뒤 화합물 생산에 최적화된 세포에 집어넣는다. 이제 이 세포 공장은 자연스레 양분을 섭취하고 성장하며 스스로 화합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진화를 통해 탄생한 자연의 산물을 인류가 효과적으로 대량생산해 마음껏 활용하는 것이다.
바이오산업 비약적 혁신 길 열려
관련 산업은 이제 막 시작됐고, 한국 또한 이를 선도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 중이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구축 중인 공공 바이오파운드리가 대표적인 예다. 이는 유전자 회로를 찾아낸 뒤 조합하고 합성하는 일련의 과정을 자동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화합물을 대량생산하기 전 초기단계에 필요한 막대한 설비를 공공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집약적이었던 바이오산업에 혁신을 가져올 것으로 내다본다. 적은 자원과 좁은 공간에서도 인류에게 필요한 수많은 화합물을 지속가능하게 생성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