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형벌의 집행유예제도 개선 필요하다
한국의 형사절차는 검사가 주도한다. 법원은 소극적 역할에 그친다. 그러나 법원이 책임원칙의 범위 안에서 범죄자의 처우에 맞는 형벌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범죄예방과 범죄자의 사회 복귀에 기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현행 집행유예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
먼저 벌금형 집행유예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 2018년 1월 7일부터 500만원 이하 벌금형의 집행유예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벌금형의 집행을 일정 기간 유예해 의무사항을 준수하도록 하며 그 기간을 경과하면 벌금을 내지 않도록 하는 제도다. 이른바 현대판 장발장으로 불리는 빈곤층 생계형 범죄자들의 노역장 유치를 막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2021년에 정식절차에서 벌금형이 선고된 사건 중 집행유예는 2801건에 불과하다. 반면 실형은 6만4607건이나 된다. 38만1073건의 약식절차에서는 한건도 없었고, 정식재판이 청구된 3만9136건 중 1694건에 대해서만 벌금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약식절차를 포함해 벌금형이 선고된 사건 중 집행유예(4495건)는 1%에 그쳤다.
2021년에 3년 이하 징역·금고형(흔히 자유형으로 부름)이 선고된 사건 중 집행유예(8만8078건)가 실형(7만5447건)보다 많았다. 이렇다 보니 2019년 기준 500만원 이하 벌금을 납부하지 못한 미납건수는 13만8000여건이었는데, 2020년 14만2000여건, 2021년 19만9000여건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더욱이 벌금 미납 사회봉사명령제도가 시행된지 13년이 넘었지만 사회봉사명령 신청 건수가 2021년에 6631건(1.5%)에 불과했다.
약식절차에선 벌금형 집행유예 선고 없어
왜 약식절차에서는 벌금형 집행유예 선고가 한 건도 없는 것일까. 약식절차는 경미사건의 신속한 처리를 위해 마련한 서면 심리절차로서 검사의 약식명령청구서에 의존하는데, 2019~2022년 한해 평균 44만여건에 달한다. 이만한 분량의 약식명령사건에 대해 법원이 벌금형 집행유예 선고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벌금형 집행유예제도를 도입하면서 약식절차에서도 이를 선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했는데 법원은 사건처리 부담을 걱정해 오히려 제도의 활용을 어렵게 했다. 약식명령에 대한 정식재판청구를 주저하도록 형사소송법을 개정한 것이다.
종전에는 불이익변경금지원칙이 있어서 예컨대 3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은 사람이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정식절차에서 그 금액보다 높은 금액을 선고하지 못했다. 따라서 생계형 범죄자들이 벌금형을 선고받고 부담없이 벌금형의 집행유예를 기대하면서 정식재판을 청구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을 의식해 형종변경금지원칙으로 개정한 것이다.
약식명령에 대해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벌금형을 자유형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벌금액수를 상향할 수 있도록 했다. 실제로 약식명령 고지서에 정식재판을 청구하면 벌금액이 무겁게 바뀔 수 있음이 명확하게 기재돼있다. 약식절차에서 벌금형 집행유예 선고가 한건도 없는 이유다.
벌금형 집행유예제도의 공백을 인권연대가 2015년 설립한 장발장은행이 메우고 있다. 선고받은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에 끌려갈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최대 300만원(상환기간 1년)을 무이자·무담보로 빌려준다. 지난 8년간 장발장은행의 대출액은 20억원을 넘어섰다.
전부와 전무 사이의 일부집행유예제도
다음은 일부집행유예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 형사사건 피의자가 수사 중에 법원에서 구속영장이 발부돼 구치소에 수감되면 그 후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되더라도 흔히 유죄라고 생각한다. 거꾸로 불구속된 상태에서 수사를 받다가 법원에서 유죄가 선고되더라도 집행유예를 받으면 흔히 무죄라고 인식한다.
이런 점에서 형벌의 응보적 기능을 유지하면서 예방적 효과도 거둘 수 있는 일부집행유예제도가 필요하다. 일부집행유예는 실형과 집행유예의 사이에 일종의 전부(All)와 전무(Nothing)의 사이에 있는 제도다. 예컨대 법원이 징역 2년을 선고하면서 그 중 일부인 1년만 집행을 유예하고 1년은 집행을 하는 방식이다. 또 법원이 벌금 200만원을 선고하면서 100만원만 집행을 유예하고 100만원은 집행을 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