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작의 기후행동
어쩌면 토마토는 맛보기일지도
토마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채소다. 우리나라에서는 배추가 '금추'라 불릴 때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다른 세계에서는 토마토가 그 역할을 한다.
영국에서는 올해 시작부터 토마토 공급이 부족해지자 슈퍼마켓에서는 토마토 구매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기후 전문 기고가인 라라 윌리암스는 "토마토 부족은 미래에 닥칠 충격에 비하면 맛보기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영국인들이 한겨울에 아보카도를 소비하고 한여름에 시금치를 먹는 게 당연한 듯 여기지만 지금 슈퍼마켓에서 벌어지고 있는 토마토 배급을 보면서 사계절 샐러드 시대의 종말을 우려해야 할 처지라는 걸 일깨웠다.
영국에서 토마토 대란이 일어난 배경에는 기후변화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영국에 겨울 토마토를 주로 공급하던 스페인에서는 2022년 여름의 이상고온에 이어 금년 1월에는 이상한파가 몰아쳐 토마토 생산량이 감소했고, 모로코에서는 홍수로 인해 토마토 생산이 타격을 받았다.
12월부터 3월까지 자국에서 소비되는 토마토의 95%를 수입하는 영국은 직격탄을 맞았다. 기후위기와 지정학적 위기가 결합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를 영국의 소비자들은 뼈저리게 실감했다.
영국과 한국, 기후변화가 만든 토마토 위기
국내에서도 지난 3월 토마토가 뉴스 전면에 등장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기후변화가 배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원인과 전개가 영국과는 판이했다. 방울토마토를 먹고 구토와 복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토마토 위기가 시작됐다. 정부는 서둘러 조사에 착수했고, 토마토에 들어있는 토마틴이라는 당알칼로이드 성분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 토마틴은 토마토가 외부 공격을 받았을 때 생성하는 물질로 쓴맛이 나며 독성을 띤다. 토마토가 익으면서 사라진다. 그런데 식물의 방어기작을 불러일으킨 원인으로 지난 1월의 한파가 지목되었다. 따뜻한 겨울에 이은 갑작스러운 한파에 특정 품종의 토마토가 외부 공격으로 인식하고 방어물질을 축적한 것이다. 정부는 서둘러 해당 품종의 토마토를 수거했지만, 토마토 소비가 줄어드는 걸 막지는 못했다. 이렇듯 기후변화는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식량문제를 유발한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영국의 식량자급률이 낮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예상과는 달리 영국은 곡물은 거의 자급할 뿐 아니라 축산물도 대체로 국내 수요를 맞출 만큼 생산하고 있다. 단지 신선채소와 과일 자급률이 각각 54% 및 16%로 낮을 뿐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곡물자급률은 낮지만, 잎채소류 및 근채류의 자급률은 85%를 넘어선다. 곡물 생산에 필요한 평야지가 부족한 게 근본적인 원인이지만 농민들이 단위 면적당 소득이 높은 원예작물에 집중한 것도 한몫한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기후위기 대응과 식량안보의 중요성에 대체로 공감한다. 그 목소리가 영국의 소비자들보다 훨씬 더 클 것이라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낮은 곡물자급률에서 위기감을 느끼지만 기후변화는 그보다 더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자급률이 높으면 영국의 토마토 품귀와 같은 외부 요인에 의한 시장충격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배추처럼 국내 이상기상에 의한 생산량 감소에는 취약하다. 배추가격이 폭등한 해에는 김치 재료를 양배추 등으로 바꾸거나 김치 소비 자체를 줄이는 방법밖에는 없다.
영국은 수입에 의존하는 식품에 대한 공급망을 유럽과 비유럽으로 나누어 관리한다. 그런데도 토마토 품귀현상을 예방하지는 못했다. 유럽의 토마토를 실어 나를 트럭 운전사들이 운행을 꺼렸기 때문이다. 도버해협을 건너기 위해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 게 원인이었다.
겨울 토마토와 딸기 낯설어질 때 올 수도
우리는 식량위기가 무언가 부족해서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단 훨씬 더 복잡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겨울 토마토와 딸기가 낯설어지는 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상황을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다.
물론 지금은 그마저도 희망사항에 가깝다. 가끔은 기후변화라는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럴 때는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지를 돌아보면 어떨까? 토마토는 어쩌면 우리가 마주칠 위기의 맛보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