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아세안의 핵심 가치는 '다양성 속의 조화' 추구

2023-04-21 10:42:47 게재

다양성은 문제가 아닌 최고의 자산이라는 아세안의 시각 … 문화 다양성은 인류 창의성의 표현

정해문 전 태국 대사

아세안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다양성 속의 조화 또는 통일이다. 다양성은 아세안의 생명이다.

아세안은 하루 24시간 다양성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살고 있다. 10개 아세안 회원국은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으로 가득 차 있다. 정치 체제, 문화, 종교, 인종, 언어, 신념, 습관, 관행, 인구, 경제 규모 등 거의 모든 면에서 회원국 간 다양성 또는 차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점이 바로 아세안의 역동성과 활력, 건강함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며 값을 매길 수 없는 아세안의 귀중한 자산이라 할 수 있다.

◆아세안 헌장에 다양성 존중 명시 = 아세안은 다른 지역에서는 일견 부채로 여길 수 있는 다양성 또는 차이를 지역 최고의 자산으로 승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아세안의 저력과 복원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세안 헌장 제1조 목적은 "이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 유산에 대한 이해 증진을 도모함으로써 아세안의 정체성을 고취한다"라고 명시하면서 문화와 유산의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 제2조 원칙은 "다양성 속의 통일 정신으로 아세안 시민들의 공통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 아세안 시민들의 상이한 문화, 언어 및 종교를 존중 한다" 고 명확하게 밝힘으로서 공통의 가치와 상이한 문화, 언어, 종교 간의 병존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한 지역협력 기구로 평가받고 있는 유렵연합(EU)과 아세안은 확연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동·중유럽 국가들의 가입으로 27개 회원국을 가진 유럽연합은 회원국 간 경제력 차이를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동질성을 두루 갖춘 지역 협력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회원국이 민주주의와 기독교라는 두 축 위에서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유럽 통합을 심화하고 확대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아세안 10개국은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으로 가득 차 있다. 정치 체제, 문화, 종교, 인종, 언어, 신념, 습관, 관행, 인구, 경제 규모 등 거의 모든 방면에서 회원국 간 다양성 또는 차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점이 바로 아세안의 역동성과 활력, 건강함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며 값을 매길 수 없는 아세안의 귀중한 자산이다. 사진 아세안 홈페이지 홍보영상 캡춰


아세안의 조화로운 문화 다양성 신봉은 사무엘 헌팅턴 교수가 주창한 '문명의 충돌' 이론과 관련하여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다수의 사려 깊은 학자들은 헌팅턴 교수가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탈냉전 시대에 문화는 분쟁의 원천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바와 같이, 문화 다양성이 평화와 조화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상정한다. 문명 충돌 이론은 학계와 비학계의 논쟁을 유발하였으며 아세안 국가들의 문화 다양성 존중은 헌팅턴 교수의 추정이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였다. 1967년 아세안 창설 이래 어떤 두 회원국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음은 실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아세안은 이따금씩 분쟁에도 불구하고 회원국 간의 관계를 평화롭게 지켜왔다. 세계는 오랜 기간 문화적, 종교적 차이로 인한 다양한 갈등, 다툼 및 충돌을 목격했다. 어떤 나라에서는 쇠고기 살을 요리하거나 소지하였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할 수 있었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신성모독 주장에 휘말려 큰 고통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아세안은 다양한 국가들을 단일대오로 뭉치게 한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아세안은 낙관주의와 실증주의로 충만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고무시키거나 다른 사람들이 모방할 사례를 많이 갖고 있다. 이는 다른 나라들에 훌륭한 롤 모델이 될 수 있다. 아세안은 지역 통합을 위한 훨씬 현실적이고 달성 가능한 모델을 제시한다. 다양성 속의 통일이라는 아세안의 간판은 평화로운 환경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많은 묘약을 준다.

◆정치, 경제, 인종, 종교, 언어 모두 달라 = 아세안의 다양성을 몇 가지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세안이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생명체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우선 10개 회원국의 정치 체제를 보면, 민주주의 국가, 권위주의 국가, 공산주의 국가, 왕정 국가, 술탄 국가, 군부통치 국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문화 다양성을 관찰해 보면, 아세안 회원국은 태생부터 다문화 국가로 출발했다. 아세안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지난 수천 년에 걸쳐 중국, 인도, 유럽 및 중동의 국가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면서 영향을 받고 동시에 교류를 이어 왔다. 다문화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회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결과 아세안 회원국들의 문화는 그들의 인종적 공동체 및 역사적 공동체만큼이나 다양하다.

종교 또한 아세안의 다양성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 분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불교, 힌두교, 유교, 이슬람, 기독교 및 가톨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주요 종교 모두가 동남아 지역에서 뿌리내리고 있다. 동양과 서양의 문명과 종교는 상호 간에 영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지역의 문화 중에서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문화는 없었다. 가장 전통적 사회마저도 영향을 받았다.

수니 이슬람은 인도네시아 및 말레이시아에서 강력한 뿌리를 내렸으며 '테라바다' 불교는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 및 라오스에서 번성하고 있다. 불교와 유교는 공산주의 국가 베트남에서 정신세계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필리핀은 아세안에서 유일한 가톨릭 국가이다. 외국의 문화적 영향은 많은 변화를 촉진했지만, 이 지역 자체의 문화는 여전히 융성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다양한 토착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 지역 여러 국가들의 유사한 문화적 기원으로 인해 그 토착 문화의 공통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아세안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다양성은 아세안 국가들과 역사적인 관계를 맺은 바 있는 서구 국가들과 관계에 있어서 일종의 교량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동남아 지역의 수많은 언어 또한 이 지역이 자랑하는 다양성의 증거라 할 수 있다. 각 아세안 회원국은 다수의 토박이 언어와 지역 언어를 사용한다. 해양 동남아 국가와 대륙 동남아 국가의 언어 역시 다르다. 해양 국가들은 오스트로네시안(Austronesian)에서 파생된 언어를 모국어로 쓴다. 이 언어는 시제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대륙 국가들은 오스트로 아시아(Austro-Asiatic) 언어에서 파생된 크메르어-몬스(Mons) 언어를 주로 사용하는데 모음 체계가 매우 다양하다는 특징이 있다. 개별 아세안 회원국 각자 공식 언어를 보유하며 방언이 광범위 하게 쓰이고 있다. 영어는 회원국 다수의 공식 비즈니스 언어로 자리매김 했다. 인도네시아에는 200여개 종족 언어가 존재한다. 경제 발전 정도 역시 아세안 다양성의 한가지 중요한 척도라 하겠다.

2022년 아세안 통계집에 의하면, 10개 회원국의 일인당 GDP 또한 천차만별이다. 일인당 GDP 1위 싱가포르는 7.2만불, 2위 브루나이는 3.2만불, 3위 말레이시아는 1.1만불, 4위 태국은 0.7만불에 이른다. 나머지 6개국(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은 약 4500불 이하 수준이다.

◆다문화 종주국 아세안에서 배워야 = 사람들 간의 소통이 국경을 넘어 실시간대로 활성화 되고 있는 오늘날 다양성은 시대의 조류다. 단일성은 다양성과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면서 연마되고 고도화 될 수 있다. 다양성 중에서도 특히 문화 다양성은 국제사회의 조화로운 발전과 국가 간 평화 증진에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이다.

세계에는 여러 다양한 문화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 사실이고 인류는 이로써 형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 다양성은 인류 창의성의 표현이자 인류 노력의 결실이며 인류의 집단적 경험의 총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양한 문화들은 인류의 풍요로운 자산으로 공유되고 향유되어야 한다.

아세안의 다양성은 지구촌 다양성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은 세계 속의 아세안 다양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매일 실시간대로 지켜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우리는 아세안의 다문화주의가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전환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동시에 어떤 순기능을 해왔는지 현장에서 목격하며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아세안 다문화주의의 핵심은 다양성 속 통일성이다. 이는 모든 공동체 건설의 전제로 자리 잡아야 하며 이러한 가치를 우리나라의 다문화 사회에도 녹여내야 할 것이다. 다문화 한국에 있어서 아세안은 중요한 거울 역할을 한다. "아세안에 나가 있는 한국보단 한국 안에 들어와 있는 아세안 더 중요하다" "다문화 시대에는 이주민의 사회 적응뿐 아니라 내국민의 새로운 마음가짐이 요구된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아세안은 한국의 다문화 사회 형성과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인식 변화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아세안이 걸어온 다문화 발자취는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한-아세안 파트너십이 문화 다양성과 다문화 협력을 더 비중 있게 다루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