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광주답게' 살다간 청년, 신영일
1980년대 학생·민중운동 지도자 … 동지들 회고 엮어 평전 발행
전두환 군대가 학살을 하고 계엄군이 스무살 스물한살 스물두살 청년들을 쫓아 거리와 골목을 뒤지고 주택가를 수색하던 그 시절. 1980년 5.18을 겪은 청춘들이 있다.
시대가 안긴 상처를 평생 떠안으며 살고 있는 그들은 "가장 광주다웠다"고 한 청년을 꼽았다. 5.18 이전에는 학생운동을 이끌었고 이후에는 민중운동을 주도했던 신영일(1958~1988)이다.
서른한해, 짧지만 불꽃같은 삶이 책 한권에 담겼다. 고인의 아내 김정희씨를 비롯해 임낙평 박용수 이상걸 등 신영일과 함께 광주를 살았던 동지들 이야기를 모아 엮은 '신영일 평전(도서출판 걷는사람 폄)'이다. '문익환 평전' '김남주 평전' 등을 기록한 시인이자 소설가 평론가인 김형수 작가가 정리했다. '광주의 불씨 하나가 6월 항쟁으로 타오르다'는 부제는 신영일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이다.
1958년 전남 나주시 남평면에서 태어나 광주 제일고를 졸업하고 1977년 전남대 사범대 국사교육과에 입학하기까지 신영일은 기타를 즐기고 포크송을 좋아하던 청년이었다. 1978년 전남대 교수들이 '국민교육헌장'에 저항하며 발표했던 '우리들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촉발된 6.29 시위로 무기정학을 당했고 고 박기순 열사가 광주공단에서 창립한 들불야학에 합류했다. 광주공단 노동자 실태조사에 참여했고 5.18 이후 침묵과 패배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발표한 '반제 반파쇼 민족해방 학우 투쟁선언 성명서'를 주도하면서 '지도자'로 거듭났다.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주장하며 박관현 열사와 함께 진행한 40일 단식투쟁. 저자는 "5월 학살로 폐허가 된 광주를 다시 민주화의 성지로 되돌리는 반환점이 됐다"고 평가한다. 기적적으로 소생한 뒤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를 창설했고 1986년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 현판식때 금남로에 운집한 3만여명 군중을 선동, 대중 시위로 점화시켰다. 전청련은 인천5.3항쟁에 이어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낸 주역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는 대선 패배 이후 열병을 앓기 시작했고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책은 신영일 평전이되 동시대를 견뎠던 청춘들의 기록이다. 그를 망월동 옛 5.18묘역에 안장하고 35년째 추모하고 있는 이들이다. 저자는 "광주민중항쟁은 1978년에 시작됐다고 생각하면서 썼다"며 "(6월 항쟁이 낳은) 1987년 체제라는 말 속에 청년 신영일의 뜨겁고 슬픈 역사가 있고 그가 못다 이룬 미완의 꿈이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