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당연한 권리'라는 것은 있을까

2023-06-07 11:08:13 게재
김준영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 사무처장

'인권'은 인류의 변화·발전 과정에 오랜 철학적 논쟁을 통해 정리된 개념이다. 그런데 필자는 원래 주어진 권리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최근 한 노동조합이 400일 넘게 천막을 치고 투쟁하는 분쟁을 해결해 보겠다고 나서면서 그 첫날 반성부터 했다. 직업이 해결사도 아니면서 '해결'이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을 반성했고, 노사의 분쟁 그 밑바닥을 보지 않고 기술자처럼 접근한 것을 늦게나마 반성한다.

사내하청의 불완전한 노동3권이 문제

노사는 2021년도 임금교섭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3년간 합의한 사항이 단 한줄도 없다. 그러다 보니 노동조합이 천막을 쳤다. 그런데 지역과 주변의 평가는 "노동조합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며 노조를 탓하거나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라는 말로 노사 양쪽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400일 넘게 투쟁하며 요구한 것들은 대부분이 최소한 동종 사업장과 비슷하게라도 해달라는 것이다. 이 지역 노조 대부분이 하나의 대기업 하청사이고 그 수익은 대기업에게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같은 하청사 수준을 맞춰달라는 것이, 단체협약을 지켜달라는 것이 왜 무리한 요구인가? 다른 노조의 조건을 비교해 보면 당연한 요구들이다.

그런데 왜 이 노조만 이렇게 투쟁하고 있을까? 노조가 주어진 조건에 순응하고 적당히 타협해야 한다는 의식과 '노동자에게 그냥 주어진 당연한 권리 같은 것은 없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만들고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의식이 부딪히고 있다.

저 밑바닥 어딘가에 사용자의 뿌리 깊은 노조혐오가 깔려 있다. 사용자의 은혜로운 시혜를 인정하면 더 좋은 시혜가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굳이 마다하고 노동자의 당연하고 정당한 권리로 만들어 내겠다는 노동자의 의식이 이에 맞서고 있다.

노사합의는 노사 간 힘의 역관계라는 조건에 따라 노사 양쪽 의견 어딘가에 점을 찍는 과정이다. 그런데 대기업 사내 하청사에게는 노사 힘의 역관계가 적용되지 않는다. 사내 하청노동자들에게는 노동3권 중 쟁의권은 보장되지 않는다. 노조를 만들고 교섭할 수는 있지만 원청의 대체근로가 합법이기 때문에 쟁의권 행사는 의미가 없다.

노란봉투법이 필요한 진짜 이유

그래서 원청사더러 이런 분쟁을 해결하자고 하면 하청사 노사문제에 공식적으로 개입하기 어렵다 한다. 그러면 하청사 쟁의에도 개입하지 말라고 하면 조업차질을 그냥 지켜볼 수는 없다고 한다. 사내하청 노동자의 온전하지 않은 노동3권이 이 투쟁을 400일 넘게 만든 근원적 이유다. 국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노란봉투법'이 필요한 핵심도 바로 이것이다.

악법을 어겨서 깨뜨리려면 대우조선 사례처럼 엄청난 손해배상을 하청노동자가 감당해야 하는 그 악순환의 고리에 사내 하청노동자의 투쟁이 있다. 하청노동자에게는 불법인 줄 알지만, 그 투쟁을 선택하든가 질기게 버티든가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시 한번 확인한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권리가 있는 것처럼 '노동자에게도 당연히 주어진 권리가 있다'는 대부분 문명사회에서 합의된 그런 의미의 당연한 권리라는 단어는 2023년 대한민국에는 없다. 당연한 권리, 정당한 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만이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