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와 함께하는 과학산책
양자터널로 원자를 본다
최근에 아날로그 트렌드를 반영해 음반 판매량에서 엘피(LP)의 비중이 씨디(CD)를 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LP가 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카트리지에 달린 바늘이 LP판의 홈 사이를 이동하면 상하좌우로 진동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원자를 하나씩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역시 양자역학이 적용된다.
터널링(tunnelling)은 막힌 벽이나 산을 뚫어서 자동차나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구조물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양자세계에도 터널링이 있다. 금속에 있는 전자들은 컵에 반쯤 차 있는 물분자로 비유할 수 있다. 물분자가 컵 밖으로 나오게 하려면 뭔가가 에너지를 주어서 컵의 벽을 넘을 수 있도록 하면 된다. 물을 끓이는 것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아니면 강력한 물줄기를 만들어서 컵을 뚫고 나오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 물분자가 컵 밖으로 나오는 방법으로 벽을 넘거나 깨 부수는 것 말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하지만 금속 안에 있는 전자는 자신을 가두고 있는 에너지 장벽이 높아도 장벽을 넘지도 깨지도 않고 그냥 빠져나올 수 있다. 이런 현상을 양자터널링이라고 한다. 이는 순수하게 양자역학을 사용해야만 설명이 가능한 현상이다. 야구공을 벽에 던졌는데 튀어 나오지도 않고 벽을 부수며 뚫고 가지도 않고 벽은 그대로 두고 투과해 가는 것 같은 상황이다.
실제로 야구공을 벽에 던지는 경우에도 양자터널링을 할 수 있다. 다만 그 확률이 매우 낮아서 우주의 나이보다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던져도 양자터널링이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이 현상을 이용해 전자현미경에서 사용하는 고품질의 전자빔을 얻을 수도 있고 탄소나노튜브를 이용한 디스플레이를 만들 수도 있다.
주사터널링현미경으로 원자 관찰
양자터널링은 두개의 금속을 아주 가까이 놓고 전압을 걸어도 일어난다. 금속이 서로 닿아서 전류가 흐를 정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까우면 양자터널링으로 전자가 이동해 작은 전류가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이용하면 투과전자현미경처럼 시료를 특별히 얇게 가공하지 않고도 개별 원자를 관찰할 수 있다. 이를 '주사터널링현미경'이라고 한다.
원자를 관찰하고자 하는 시료 표면에 끝이 아주 뾰족한 바늘을 원자 하나 간격 정도로 가까이 두고 전압을 걸면 바늘 끝과 시료 표면의 원자 사이에 양자역학적 터널링을 하면서 전류가 흐른다. 이 전류는 시료 표면과 바늘 사이의 거리에 극도로 민감하다. 따라서 시료 표면 가까이에서 바늘을 움직이면서 터널링 전류를 기록하거나 전류가 일정하도록 바늘의 높낮이를 조절하면서 위치를 기록하면, 흑백 브라운관 TV의 전자총이 화면을 한줄씩 만들어 가듯 시료표면의 전자의 밀도, 즉 원자의 영상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주사터널링현미경은 투과전자현미경과는 달리 원자를 관찰하기 위해서 시료가 아주 얇지 않아도 된다. 대신 시료 가장 바깥쪽에 붙어 있는 표면 원자들만 관찰할 수 있다. 이렇게 표면의 원자를 관찰하면서 알아낸 중요한 사실은 상온에서는 원자들 대부분이 표면에서 많이 움직이거나 진동하기 때문에 원자를 안정적으로 관찰하려면 온도를 매우 낮춰야 한다는 것이다.
주사터널링현미경에 사용하는 바늘을 잘 조작하면 시료 표면에 있는 원자를 하나씩 집어서 원하는 장소에 가져다 둘 수도 있다. 1989년 미국 산호세 IBM연구소의 아이글러와 동료들이 니켈(Ni) 위에 있는 제논(Xe) 원자 35개를 움직여 'IBM'이라는 글자 모양으로 배열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 이후 이 기술로 다양한 모양으로 원자를 배열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원자를 하나씩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원자를 하나씩 움직여 원하는 구조와 성질을 가진 물질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꿈을 품었다. 이것이 '상향식 나노기술'의 시초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아직도 여러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원자 움직여 원하는 물질 만들 수도 있어
단 주사터널링현미경 기술로 원자 하나를 원하는 위치에 가져다 두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현재 기술로는 요원하지만 만일 1초에 원자 100개를 원하는 위치에 갖다 놓을 수 있다고 해도, 눈으로 보이는 모래 알갱이 크기 물체를 원자를 하나씩 조립해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요된다. 모래 알갱이에 대략 원자들이 10²¹개쯤 있다고 한다면, 3000억년 넘게 걸려야 가능하다. 이는 알려진 우주나이 138억년보다 20배 이상 되는 긴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