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아프간 버전의 향수병 '사스(SARS)'

2023-08-04 11:51:39 게재
송웅엽 조선대 객원교수, 전 이란·이라크·아프간대사

아프가니스탄은 참 묘한 나라다. 대자연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곳, 그곳에 사는 사람들도 인간의 본성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중국 파미르고원에서 인도양까지 해발고도 평균 3000m에 달하는 힌두쿠시산맥이 아프간을 관통한다. 아프간은 산맥 사이사이 분리된 작은 계곡들의 나라이며 사막과 몇몇 대도시의 나라다. 그 안에서 3800여만명이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며, 제각기 종파가 다른 여러 부족을 이루어 살고 있다.

헬기를 타고 내려다본 풀포기 하나 없는 힌두쿠시산맥은 옛적 어머니가 백년손님 사위를 위해 정성껏 다듬던 씨암탉 갈비뼈를 닮았다. 그 앙상한 갈비뼈 속에 구리 철광석 희토류 등 약 3조달러에 달하는 지하자원을 품고 있다.

아프간은 동북아시아·서남아시아·중동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이며 고대 실크로드의 거점 가운데 하나였다. 페르시아제국과 몽골제국,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 대륙을 침공했다.

인도를 통치한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아프간을 3차례 침공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소련의 10년 점령과 미국의 20년 점령 역시 실패로 끝났으며 아프간은 '제국의 무덤'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아프간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풍토병

2007년 7월 23명의 샘물교회 선교단이 아프간에서 납치되어 2명이 살해되고 나머지 단원들이 44일 만에 귀국하는 불행한 사건이 수습된 후 필자는 2008년 봄 주아프가니스탄 대사로 부임했다. 피랍사건 이후 아프간은 여행금지국으로 지정돼 아프간에 체류하던 우리 국민들은 귀국하거나 제3국으로 이전했지만, 미국 시민권을 가진 한국계 미국인 다수가 다양한 목적으로 아프간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프간의 풍토병인 아프간 버전 사스(SARS, Severe Afghan Return Syndrome, 중증아프간귀환증후군)에 감염되었다고 고백하며 필자도 감염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조언했다. 삭막하고 척박한 아프간 생활은 힘들고 위험하지만 한번 아프간을 다녀간 사람은 다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의 일종인데 아프간의 자연과 사람이 풍기는 묘한 매력에서 발원했노라고 웃으며 설명했다.

아프간의 치명적 매력 가운데 또 하나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라는 인물이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항해 '판지시르의 사자'로 불리는 전설적인 게릴라 지도자로 아프간의 모든 종족으로부터 존경받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다큐멘터리 작가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는 부족 중심의 전통적 아프간 전투방식에 마오쩌둥과 체 게바라의 게릴라 전법을 적용한 마수드를 '소련의 와해와 냉전의 종식에 기여한 탁월한 전략가'로 평가했다.

아프간의 구조적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는 '아편'과 '군벌'이다.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인 아프간의 주산업은 농업이지만 장기간의 전쟁으로 경작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양귀비 재배에서 돌파구를 찾았으며 세계 아편의 약 85%를 생산한다. 양귀비꽃이 지고 열매가 익어서 씨가 나오기 전 표면에 상처를 내어 채집한 액즙은 아편과 헤로인의 재료이자 말기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 모르핀의 원료이기도 하다.

1989년 소련이 물러간 후 무자헤딘 파벌들은 세력다툼을 벌였고 승자는 군벌로 성장했으며 군벌 간 내전이 발발했다. 군벌들은 안정적 자금 확보를 위해 양귀비 재배를 장려했다. 1996년 집권에 성공한 제1기 탈레반정권은 2000년 군벌의 발호를 막기 위해 양귀비 재배를 금지하자 아편 생산량이 90% 감소했다.

그러나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은 아프간 군벌들을 이용해 탈레반정권을 무너뜨렸고 정권에서 축출된 탈레반은 양귀비 재배를 통해 정권 탈환을 위한 재원을 확보했다. 2021년 8월 집권에 성공한 제2기 탈레반정권은 2022년 4월 또다시 양귀비 재배 금지령을 발표했다.

아편 생산량 추이가 정권 안정성 지표

향후 아프간의 아편 생산량 추이는 탈레반정권의 안정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탈레반정권에 대한 해외원조가 대부분 중단되고 대체작물 재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 비춰 금지령 이행 여부는 불투명하다.

특히 파슈툰족 중심의 탈레반정권에 대항해 소수민족(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하자라족 등) 군벌들이 연합하고 있으며 탈레반의 이슬람 통치이념을 비판하는 강경파 '이슬람국가 호라산 지부(IS-K)'의 테러가 지속되고 있는 만큼 탈레반정권의 안정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