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LH는 빙산의 일각이다

2023-08-28 11:36:31 게재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지난 20일 퇴직자가 근무하고 있는 전관업체와의 계약을 백지화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15일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의 지시에 따라 전관업체와의 용역계약 절차를 중단한데서 한발 더 나아가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다.

이미 맺은 계약을 취소한다는 것은 상거래 세계에서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런 극단적 조치를 내린 것은 부실공사 원인의 하나로 지목된 '전관야합'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크기 때문이다.

이같은 공분은 LH가 자초한 것이다. LH는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의 철근 누락 사실을 발표한 지난달 31일 이후에도 전관업체와의 계약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LH 퇴직자가 취업한 업체들이 설계·감리용역을 싹쓸이한 실상이 드러났는데도 말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무책임의 결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전관카르텔, 건설 분야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 똬리

실제로 전관업체들이 LH 주택단지 건설사업의 용역을 독식하는 문제는 심각한 수준임이 드러났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 따르면 1차로 철근누락 사실이 드러난 15개 아파트 단지 중 13개 단지의 설계가 LH 퇴직자가 임직원으로 근무하는 업체에 맡겨졌다. 8개 단지는 전관업체가 감리를 맡았다. 2개 단지 이상을 중복으로 수주한 전관업체도 있었다. '철근 누락'이 뒤늦게 드러난 5개 아파트도 역시 LH 전관업체의 몫이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계약을 백지화한다는 등 부산을 떨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과 이한준 LH사장에게 "한국토지주택공사(LH) 혁신과 건설 카르텔 혁파를 차질 없이 이행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LH의 경우 퇴직자와 현직이 서로를 '배려'하면서 야합이 발생했으니 당연히 '혁파' 대상이다. 여기서 그치지 말고 입찰담합을 비롯한 건설 분야의 각종 카르텔을 근절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제 건설정책과 행정 패러다임도 재설계돼야 하지 않을까 싶다. 건설정책과 행정을 소비자 입장에서 전면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설정책이 건설사를 비롯한 공급자 위주로 수립된 측면이 강하다. 그러다보니 건설사들 사이에서는 웬만한 부실과 하자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이 묵인해 주리라는 암묵적 믿음이 형성된 것 같다. 그런 탓에 공사가 끝난 아파트의 하자민원도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난다. 이번에 드러난 '철근 빠진 아파트'도 그런 암묵적 믿음에서 초래된 참사가 아닐까?

그렇기에 이제 건설업계의 그런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쇄신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건설공사의 부실여부를 감시감독하고 준공검사를 전담할 독립기구를 설립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전관카르텔은 건설 분야에서만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금융과 법조 방산 교육 등 사회 구석구석에 독버섯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 피해는 선량한 소비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된다. 은행이나 카드사 등 금융사에서는 금리나 수수료가 소수 대기업에 의해 일방적으로 책정되고, 이동통신 비용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소비자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데 골몰한다.

그런데도 정부와 유관기관은 이를 제대로 감시감독하지 못하고 있다. 그 중요한 비결의 하나는 바로 전관카르텔이라 할 수 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사는 정치권이나 금융당국자들을 끌어들여 방어막을 친다. 재벌들도 정부당국자들을 영입해 적절히 활용한다. 그러는 사이 소비자나 주주의 권리는 원천적으로 배제된다. 법원과 검찰, 그리고 변호사 등의 야합으로 인한 수사와 재판의 왜곡도 허다하다. 이른바 '법조3륜'이라고 하는 말도 그런 야합을 근사하게 포장한 조어가 아닌가 한다.

전관야합 해체 하나만 해내도 큰 업적으로 기록될 것

이렇게 볼 때 LH의 전관야합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할 수 있다. 차제에 LH의 전관야합을 끊어내고 한국의 경제와 사회 곳곳에 고질화돼 있는 각종 유착관계를 뿌리뽑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직자 취업제한 제도도 다시 살펴 강화돼야 한다.

전관야합은 워낙 오래 묵은 악습이요 적폐다. 역대 어느 정권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만약 윤석열정부가 지금 그런 전관야합을 해체하고 혁신하는 일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낸다면 큰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과연 이 중차대한 과업을 제대로 해낼지 지켜봐야겠다.
차기태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