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시장의 문턱을 못 넘은 진보정부들

2023-10-30 11:40:31 게재
박세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이사

김대중정부의 제1의 과제는 외환위기 수습이었다. 김대중정부는 서둘러 외환시장의 안정화를 이루었고 예정보다 3년 앞당겨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빌린 자금을 상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김대중정부는 새로운 미래산업으로 IT산업과 문화콘텐츠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IT강국, 문화강국으로 부상했다.

김대중정부는 외환위기 수습과 미래산업 육성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반 페이지 분량을 할애해 '중산층 붕괴와 사회적 양극화 심화를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술회한다. 실제로 김대중정부는 시장을 무대로 벌어지는 중산층 붕괴와 사회적 양극화 현상에 대해 거의 수수방관하다시피 했다.

이어서 노무현정부가 출범했다. 노무현정부는 시장에 대해 전혀 다르게 접근했다. 노무현정부는 시장의 적극적인 협력을 끌어내기로 하고 파트너로서 최강의 재벌 삼성을 선택했다. 김용철 삼성 전 법무팀장의 증언 등을 통해 드러났듯이 삼성은 노무현정부의 국정운영에 깊숙이 개입했다. 노무현정부는 삼성에 대해 절대적 신뢰를 품고 의지했다.

노무현정부가 삼성의 제안을 전격 수용한 대표적 사례가 한미FTA 추진이다. 한미FTA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노무현정부가 삼성만 믿고 너무 급하게 서둘렀다는 점이었다. 한미FTA 추진을 둘러싸고 노무현정부 지지 세력은 완전 둘로 분열했다. 보수세력이 노무현정부를 아마추어 집단으로 규정하고 거세게 몰아붙이던 상황에서 지지 세력의 분열은 치명적 결과를 초래했다. 노무현정부는 국정운영 동력을 잃고 말았다.

시장의 힘 과소평가한 문재인정부

삼성과의 밀월은 삼성의 노무현정부 농락으로 드러났다. 노무현의 오랜 후원자였던 강금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삼성이 노무현정부를 갖고 놀았는데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노무현정부는 초라한 경제 정책 성적표를 건네받아야 했다.

문재인정부는 김대중·노무현정부의 아픈 기억을 되새기면서 이번에는 본때를 보이겠다는 결기를 보였다.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바탕으로 시장을 요리하겠다는 모습을 보였다.

문재인정부는 간판 경제정책으로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내걸었다. 실현 방편으로 급속한 최저임금 인상을 추진했다. 생산성 정체로 지급능력이 부족했던 상태에서 '시장의 역습'이 일어났다. 시장 주체들은 고용축소 자동화 해외이전을 대폭 강화했다. 단순 반복작업에 종사하던 하위 계층 일자리가 줄었다. 애초 의도와는 정반대로 양극화가 심화하고 말았다.

문재인정부는 일자리정부를 자처하며 일자리 개선에 집중했다. 공공부문에서의 일자리 확대와 비정규직의 정규직으로의 전환에 집중했다. 결과는 공공부문과 민간 부문의 양극화 심화로 전체적인 일자리 상황 악화로 나타났다. 박근혜정부 때보다 일자리 증가폭이 줄었고 비정규직은 더 늘었다. 문재인정부는 부동산 투기를 잡겠다며 의욕적으로 나섰으나 결과는 25전 25패였다. 공급감소로 주택값은 폭등했고 민심은 폭발했다.

문재인정부 정책 실패의 근원은 상당 부분 국가와 시장 관계에 대한 오판이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시장에 대한 국가 우위가 사라졌다. 시장은 국가가 임의로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문재인정부는 이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채 국가의 힘을 과신하고 시장을 과소평가했다.

97체제 극복 못하면 민주당도 실패 반복

김대중·노무현·문재인정부 모두 시장의 문턱 앞에서 처참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시장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 문제는 외환위기를 계기로 성립한 97체제가 시장을 중심 무대로 작동했다는 데 있었다. 역대 진보정부 모두 97체제 극복을 향해 도전다운 도전을 제대로 못했음을 말해 준다.

정치평론가 박상훈은 민주당을 두고 미래를 기획할 콘텐츠 기반이 바닥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핵심은 시장의 문턱을 넘지 못한 데 있다. 민주당은 이 숙제를 풀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전임 정부의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민심은 차선도 아닌 차악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비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쉽지 않은 숙제이지만 답은 분명 존재한다.

박세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