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반도체 설계산업, 성장기회 잡아라
현 정부의 치적 중 하나로 내세우는 반도체산업 지원정책이 내년 예산 책정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반도체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정부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현재 전개되는 시스템반도체 경쟁양상은 우리나라가 샌드위치 신세로 몰리는 모습이다.
일본과 미국이 반도체 제조업에서 협력하면서 치고 올라오고 있고 대만은 일본과 미국, 유럽에서 생산거점을 빠르게 확장하면서 선두기업으로서 기술력 우위에 흔들림이 없다. 이런 샌드위치 국면을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단기적으로는 대만의 TSMC, 일본의 라피더스, 미국의 인텔과 2나노 초미세공정 경쟁에서 삼성이 최소 2등은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삼성의 공정기술 혁신과 수율 향상이 필수적이지만 시스템반도체 특성상 반도체 설계자산(IP)기업들과 협력 또한 중요하다.
반도체 위기 속에도 오히려 성장 호기 맞은 설계산업
삼성은 2018년에 IP기업과 협력하는 파운드리생태계프로그램(SAFE)을 신설, 현재까지 4500여건의 IP 포트폴리오를 확보했다. 반면 대만 TSMC는 2008년에 개방형혁신플랫폼(OIP)을 출범, 삼성보다 10배 이상 많은 IP 포트폴리오 5만5000건을 확보한 상태다.
고객사들이 IP 지원을 받아 더 쉽고 빠르게 설계할 수 있어 파운드리업체의 IP 확보는 고객 유치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샌드위치 국면 탈피를 위한 중장기 과제는 팹리스기업과 IP업체를 아우르는 반도체 설계산업을 육성해 파운드리산업과 설계산업의 안정적 선순환 구조를 확립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반도체산업의 숙원인 설계산업 육성은 역설적이게도 최근 최상의 조건에 근접하고 있다. 수요측면에서는 제조업을 비롯한 전방산업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디지털 전환과 사물인터넷 등이 활발해 수요기반은 충분한 상태다. 특히 AI 기술 발전으로 AI 반도체 시장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향후 산업 전 분야에서 큰폭으로 증가할 조짐이다. 공급측면에서는 100개 수준으로 위축되었던 설계산업 기업수가 최근 150여개로 빠르게 증가했다. 신규 스타트업들은 자동차와 데이터센터 등 신성장 산업에 진출하고, 글로벌 시장 공략에 주력하며, 창업자들은 글로벌 빅테크 출신이거나 고학력 전문가가 많고,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에 도달하겠다는 의욕이 넘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금융지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750억원,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에서 750억원, 민간투자자가 1500억원을 지원해 총 3000억원 규모 '반도체 생태계펀드'를 조성할 예정이다. 또한 삼성이 생태계 구축에 적극 나서고 있어 상생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처럼 최근의 반도체 설계산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수요 공급 기술 금융 등 모든 면에서 산업성장의 호기를 맞고 있다.
향후 7년 이내에 설계산업 안정적 성장구조 갖춰야
국내 반도체 설계산업의 성장기회는 AI 반도체 시장의 성장기와 맞물리면서 산업의 성장 탄력을 크게 증폭시킬 것이다. 다만 애플 출신 딥엑스 대표의 "시장이 안정화될 것으로 보이는 2030년 전까지 한국 기술기업들은 미국 빅테크와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경고에 귀 기울여야 한다. 7년 안에 반도체 설계산업이 안정적 성장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설계산업의 성장기회를 무산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산업기반의 신속한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 업계에서 요구하는 대표적인 과제는 시제품 비용 절감을 위한 공공 파운드리 도입, 설계검증지원센터 설립, 팹리스 전문가 양성 교육, 팹리스 전용 R&D 지원 등이다. 기업의 공통애로 해소를 위한 정부의 신속하고 강력한 드라이브가 요청된다. 부처별 기관별로 분산돼 있는 지원체제를 독일의 '인더스트리 4.0 플랫폼'처럼 민관합동 플랫폼 조직으로 통합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시련에 봉착한 한국의 반도체산업이 설계산업의 성장기회를 살리면서 대반전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