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흑묘백묘의 지혜가 필요하다
미국을 시작으로 산업정책이 부활하고 있다. 세계화에 벽을 쌓고 미국 우선주의를 몰아붙였던 트럼프 대통령에 이어 바이든 대통령도 반도체과학법, 인플레이션감축법을 만들며 산업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세계 각국은 각자도생으로 흩어지고 자국이익을 우선하는 산업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산업정책은 정부 역할을 강조한다. 경제안보와 맞물리면서 정부가 할 일은 더 많아진다. 지난 7월 제주에서 열린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최태원 회장이 "정부가 기업경쟁력 자체에 개입하는 일들이 생겨났다. 기업혼자만의 경쟁력으로 싸워서 이기기 어려운 시대가 왔다"라며 정부와 민간의 원팀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정책은 정치화되고 공무원은 무기력해져
우리나라는 산업정책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1960~1980년대 정부 주도로 제조업을 육성하고 1990~2000년대 세계화와 중국 성장을 수출확대로 연결시켜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이 제조업 중심의 산업정책을 펼쳐가고 있어 우리나라의 입지가 좁아졌다.
여기에 세계화 퇴조와 블록화는 우리 수출시장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의 첨단기술자립도 우리 미래 먹거리에 위협이 되고 있다. 정교하고 과감한 산업정책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함께 손잡고 산업수준을 한단계 더 도약시켜야 한다. 그러나 갈수록 정책은 정치화되고 공무원은 무기력해지고 있어 과연 헤쳐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정책의 연속성이나 일관성이 없어지고 있다. 정치싸움에 휘말리면서 이미 발표된 정책이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엎듯 바뀐다. 그러다 보니 기업도 정부가 발표한 정책을 곧이 곧대로 믿지 않는다. 에너지정책이 대표적이다. 탈원전과 원전확대를 둘러싼 갑작스런 정책 변경이 반복되면서 기업은 국내 에너지설비 투자를 어떻게 해야할지 주저하고 고민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의 장점이었던 신속한 정책 추진도 버거운 모습이다. 정책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특히 기술발전이 빠른 첨단산업에서 그렇다. TSMC는 일본 투자결정을 한 지 2년도 안돼 2개 공장을 짓고 있으며 추가적인 공장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보조금 지원, 그린벨트 해제 등 일본정부의 파격적이고 발빠른 지원 덕택이다. 반면 2019년 부지가 선정된 용인 하이닉스 공장은 착공을 못하고 있다. 인허가, 토지보상, 전력과 용수 등이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기력해지는 공직사회가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다. 정권이 교체되고 정책이 뒤엎어지면 남아 있는 공무원이 책임을 뒤집어쓴다. 지난 정권에서 핵심정책을 맡았던 사람이 인사에서 물먹고 심지어 감사와 수사까지 받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정책을 끌고 갈 공무원의 사명감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무기력감만 남는다. 최근 민간기업으로 공무원 이탈행렬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한다.
흑묘백묘 관점의 국익우선 정책 더 나와야
이 시점에서 뎡샤오핑의 흑묘백묘론 (黑猫白猫論)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인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서라면 공산주의든 자본주의든 상관 없다."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남긴 말이다. 부유해질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부유해지라는 선부론(先富論)과 함께 덩샤오핑의 경제철학을 가장 잘 반영하는 용어다.
흑묘백묘의 개혁·개방정책에 힘입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한 끝에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G2국가에 올라섰다. 한미 FTA, 파주 LCD단지 조성은 지지층 이탈에도 국익을 위한 과감한 결단과 신속한 집행으로 우리 경제를 한층 발전시킨 사례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 먹거리를 지키고 키워가는 데 정치적 이념으로 대립해서는 안된다. 검은쥐든 흰쥐든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는 실용적인 정책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