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국이 '단위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이유

2024-01-25 10:57:59 게재
김태용 '별일 있는 미국' 저자

"내일은 낮 기온 93도입니다" TV 기상캐스터가 말한다. 미국서 2년 살았지만 여전히 화씨온도는 적응이 안된다. 섭씨온도로 계산해봐야 확 와닿는다. 온도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소고기 2파운드, 우유 12온스, 휘발유 5갤런, 수영장 깊이 4피트 등 생소한 단위가 나오면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점이다.

전세계 모든 나라들이 무게 온도 등의 측정단위로 '국제단위계' 즉 미터법을 사용한다. 딱 3개 나라만 예외다. 라이베리아 미얀마 그리고 세계 최강국 미국이다. 전세계가 편의를 위해 단위를 통일했지만 미국만 나 홀로 '미국 단위계'를 고수하고 있다. 미국이 단위계의 이단아로 불리는 이유다.

이로 인한 불편은 실생활을 뛰어넘기도 한다. 1999년 추락한 미국의 화성탐사선이 대표적인 예다. 단지 과학자들이 파운드를 킬로그램으로 착각해서 생긴 문제였다. 단위 착오로 급유를 적게 해 불시착한 비행기도 있었다. 보호자가 복용량을 잘못 계산해 응급실을 찾는 어린이가 매년 3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계 단위 통일에도 미국만 고수

그런데도 미국은 왜 바뀌지 않는 걸까? 첫째 막대한 교체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미국 단위계는 사용된 지 거의 200년이 됐다. 캐나다는 1970년에 미터법을 도입했다. 사회 곳곳에서 단위를 바꾸는 데만 15년이 걸렸고, 납세자들은 10억달러 이상 비용을 부담했다.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소송과 항의가 이어지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대다수 미국인은 단위를 바꾸는데 비용과 시간을 감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둘째, 미국인은 단위계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에서 미국 단위계의 장점을 피력한다. 더 쉽게 이해된다고 한다. 인치는 엄지손가락 첫마디, 피트는 성인 발 크기를 떠올리면 된다. 화씨는 0과 100안에서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온도를 세분화해 더욱 편리하다고 한다.

오히려 불편함을 느끼는 건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가 미국 단위계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이 산업 분야 표준을 이끌어가는 기술 강국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일상에선 킬로미터와 미터를 얘기하다가 비행기만 타면 거리를 마일로, 고도를 피트로 전환한다.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화면 크기는 여전히 인치로 표시한다.

셋째,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의 가치관 때문이다. 사실 미국도 미터법 도입을 위해서 노력했다. 그중 1975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미터법 변환법'에 서명하면서 큰 진전이 있어 보였다. 미터법을 도입한 캐나다와 같은 길을 가는 듯했다. 그러나 큰 차이점이 있었다. 의무화보다는 국민 자율에 맡겼다는 점이다. 미국의 다양성도 한몫했다. 사실 미국에서도 미터법을 완전히 부정하진 않는다. 과학 의학 군사 등 필요한 분야에선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단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에 알맞은 단위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의 가치관

"돈을 못 갚으면 살을 1파운드 취하겠다." 셰익스피어 소설 '베니스의 상인' 문구다. 미국에 오기 전엔 그냥 읽고 넘어갔던 1파운드였다. 이제는 머릿속에서 고깃덩어리 453그램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길이 넓이 부피 온도 얘기가 나오면 머릿속 계산은 점차 빨라진다. 그래도 단위 변환은 성가신 일인 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