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처벌 프레임' 걷어야 '중대재해 예방' 보인다

2024-01-31 10:44:27 게재
백헌기 대한산업보건협회 회장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노동자에 대한 안전·보건조치를 안했거나 소홀히 해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우에 한정해 처벌하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2년이 지났다. 일하는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산업안전보건은 이념의 산물도 정쟁의 대상도 아니다.

필자는 우리나라 최대 민간재해예방기관인 대한산업보건협회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의 현장적용 과정을 최일선에서 바라봐왔다.

안전보건에 대한 기업 인식 큰 변화

시계를 2년 전으로 돌려보면 중대재해처벌법의 첫 시행을 앞두고 현장은 어수선했다. 대기업의 경영책임자들도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조성됐다. 국내의 대형 로펌에서는 대기업을 대상으로 처벌회피 컨설팅을 활성화하고자 안전보건 분야 조직을 신설하고 전문가를 투입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경영책임자에 대한 과도한 처벌은 없었다. 400건 넘게 발생한 중대재해 중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위반으로 처벌이 확정된 사례는 소수에 그쳤다. 원래 이 중대재해처벌법의 목적은 '중대재해 예방'이고 수단은 강력한 처벌이었다고 생각한다. 경영계에서는 목적보다는 수단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처벌 프레임에 갇혀 버리면 사업장의 안전·보건 조치들은 중대재해 예방이 아니라 처벌 회피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다. 이제는 '처벌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중대재해를 예방하기 위한 법이라는 사실은 좀 더 알려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필요하다면 '처벌'이라는 용어를 법률 명칭에서 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난 2년 동안 산업현장에서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몇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안전보건 조직이 기업의 중요 부서로 자리잡았고 인력과 예산도 늘었다.

특히 안전보건을 바라보는 기업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안전보건을 '비용'이라고 보던 것에서 '투자'라고 생각하는 기업이 많아졌다. 단순히 처벌회피가 아니라 근본적인 예방을 위한 조치를 하는 기업들도 많이 봤다. 이것이 중대재해 통계에는 나타나지 않는 긍정적 변화의 모습이다.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 필요

물론 과제도 있다. 지나치게 많은 서류작업 등 사무적이고 행정적인 부분에 대해서 볼멘소리가 나온다. 노동자 참여가 활성화되지 않은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서류상으로는 완벽하게 안전보건체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를 지키고 실행하는 주체는 결국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노와 사, 정부에게 산업현장 안전·보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를 당부하고 싶다.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현장에 안착할 것이라는 조급함도 버려야 한다.

시간이 흐르면 안전보건문화가 확산되고 정착될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이다. 필자가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으로 있었던 2010년대 초반, 건설업에 대한 집중관리가 산업재해 감소로 이어졌는데 관심이 느슨해진 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던 경험이 있다.

관심과 투자가 없으면 제도와 관행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생명존중의 정신조차 잊히게 된다. 우리가 긴장을 늦추는 순간 그나마 생겨나고 있는 안전보건 문화도 퇴보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