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중앙은행을 거시경제 운용의 한축으로
2018년 개봉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이 위기를 예감하고 이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그렸다. 영화에서는 당시 청와대와 경제부처 고위공무원이 한은과 함께 위기에 대처해 나가는 과정에서 불거진 갈등을 그리는 정도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당시 정책 책임자들은 위기의 징후에 무뎠거나 수수방관하면서 결국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영화에서와 같이 당시 한은 내부의 한 팀장급 직원이 위기를 느끼고 정책결정권자에게 대책마련의 시급성을 전달하려 백방으로 뛰어다녔다는 언론계의 증언도 있다.
옛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합쳐 만든 당시 재정경제원은 재정·금융·산업 등 사실상 전분야에 대한 정책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중앙은행의 고유영역인 통화정책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던 때였다. 오죽하면 한국은행을 재정경제원 ‘남대문 출장소’라고 불렀을까.
선진국클럽이라는 OECD에 막 가입해 기세등등하던 경제사령탑 귀에는 출장소급 팀장의 주장이 들어오지도 않았을 터다. 그때 한은 팀장의 말대로 정부가 적극 대처했다면 외환위기를 맞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고위 정책결정권자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달 6일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총재가 한은에서 확대 거시정책협의회를 열었다. 양측은 “차관급 정책협의회를 정례적으로 개최해, 우리경제의 구조적 문제 해법을 모색하고, 정책대안을 위해 협력할 것”이라고 했다. 바람직한 일이다. ‘남대문 출장소’로 불렸던 곳에 경제사령탑이 찾아와 사실상 도움을 요청한 것만도 격세지감이다.
두 사람 대화에서도 나왔듯 지금 한국경제는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노동공급 감소 △공정한 기회와 노동이동성 확대에 따른 혁신적 생태계의 부재 등 근본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지금 세간에는 “윤석열정부의 경제정책이 있기는 하냐”는 수군거림이 많다. 경제부처 공무원들 안에서 윤 대통령의 민생토론회에 내놓을 아이디어 때문에 머리를 싸맨다는 말도 들린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좀 더 먼 앞날을 내다보고 정권의 향방에 관계없이 거시경제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이 총재는 평소 우리나라 가계부채 문제에 대한 걱정이 많다고 한다. 연금·교육개혁과 노동개혁의 절박성도 큰 듯하다. 최 부총리도 비슷한 생각이라고 한다. “200명이 넘는 한은의 박사급 인력을 놀려서는 안된다”(한은 고위관계자)는 말처럼 이번 합의를 통해 우리 경제의 성장엔진이 다시 돌아가는 데 두 기관이 마음을 합쳤으면 한다.
기획재정부의 포용적 자세에 답이 있다. 한은도 더 이상 환경 탓하지 말고 역할을 확대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
백만호 재정금융팀 기자